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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살롱
몇 번에 걸쳐 1920년대의 독립운동사를 훑어보았지만, 조선의 독립에 한민족이 직접 기여한 바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항복한다고 해도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또 치안을 유지하며 독립 정부를 세울 주체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후 문제해결을 위한 회담이 연달아 개최되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을 시작으로, 1945년 2월 얄타회담, 1945년 7월 포츠담회담 등이다. 잇따른 이런 국제회의에서 일본 점령지인 외몽골의 독립, 베트남의 분할통치, 대만과 만주의 중화민국 반환 등이 다뤄졌지만 한반도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일본군을 패퇴시키기 위해 소련군의 참전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해방 후 한반도는 소련으로 넘긴다는 의견이 분분했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일본이 항복한 후 4개월이 지난 후에야 모스크바에서 소련, 미국, 영국의 외무상이 모여 시작했다.
정작 패전 후 한반도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곳은 일본이었다.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일본의 항복 후 발생할 수 있는 일본인의 안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가 선택한 파트너는 여운형이었다. 그는 고려공산당원이었다. 1919년에 발족한 상해 임시정부의 해체와 봉오동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 참전했던 조선독립군을 해체시킨 자유시 사건의 장본인 격이 고려공산당이다. 여운형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과 트로츠키 등을 만난 적도 있었을 만큼 열성적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당 활동이 지지부진해지자 싱가포르 등을 떠돌다 조선으로 귀국하였는데 일본은 그를 체포하여 옥에 가뒀다. 3년간의 옥살이 후 풀려난 그는 조선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을 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그는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만들었는데 이 단체가 일본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8월14일 협상을 끝낸 여운형은 즉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했다. 일본이 항복한 후 ‘건준’이 국내 치안을 담당해 일본인들에게 3개월간 식량을 보급하고 그들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건준의 활동에 대해서는 일본이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협상 내용이었다.
여운형은 8월16일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보고대회를 개최한 후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그런데 이 조직을 장악한 것은 박헌영이 이끄는 극좌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승만, 김구 등을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선출한 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고 건준을 해체한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귀국하지 않은 상해임시정부 세력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환국한 이승만도 주석취임을 거절해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연 해체가 된다. 대신 전국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어 극렬한 싸움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 정국은 공산주의 계열의 찬탁파와 민족주의 계열의 반탁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여운형은 이들 사이에서 독자노선을 걸으며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만들었지만,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채 좌우익으로부터 버림받았다가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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