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좌담

김영미 (金英美 / 경희대 교수)
박명숙 (朴明淑 / 대한민국예술원회원•경희대 명예교수)
배준용 (裵俊勇 / 성남문화재단 미래전략부)
정기헌 (鄭基憲 / 춤평론•한국춤평론가회 회장 / 사회)


■ 때 : 10월24일 오후6시30분
■ 곳 : 본지 편집실



40여 년간 매해 꾸준히 공연활동을 펼쳐온 서울댄스씨어터
정기헌 _ 안녕하세요. 지난 19일 한국춤평론가회는 “춤의 본질과 춤의 영역 확장”을 주제로 정기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현장의 예술이 멈춰진 것처럼 세미나 역시 발제자와 토론자만 참가했고, 이달 춤지를 통해 지상중계(誌上中繼)될 예정입니다. 현장의 예술은 잠시 멈춰섰지만 언택트 시대를 맞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무용계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돕기 위해 오늘 좌담은 지난 1981년 창단이래 40여 년간 한국 현대춤의 근간을 이루고 다져온 박명숙서울현대무용단(현 서울댄스씨어터)의 세 분을 모시고 어떻게 오늘날의 춤예술이 만들어져왔고, 어떤 성과를 거두었으며 어떻게 변화해나갈 수 있을지 초심으로 돌아가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지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최근 현대무용계의 흐름과 동향을 비롯해, 펜데믹으로 어려운 시기를 많은 무용가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겨나갈 수 있는지 의견 나누겠습니다. 세 분 모두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 세 분의 근황과 요즘 어떤 것에 관심을 쏟고 계시는지 소개해주세요.
박명숙 _ 저는 매일 아침 눈 뜨면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제의 나와는 다른 박명숙으로 작품을 대하고 그렇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 공연 준비도 새롭게 접근이 가능하지요. 그런 면에서는 기억력이 좀 부족한 것도 나름 좋은 점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해외 공연을 준비할 때는 여행을 준비하며 트렁크를 쌀 때처럼 설렘을 느끼며 준비를 하지요. 그 나라의 특수한 문화도 알아보고 현지 분위기도 떠올려가면서요.
국내 각 지역 공연도 그래요. 그 지방 특유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곳만의 문화를 작품에 덧입혀 재구성하면 관객들의 반응이 훨씬 적극적이고 친화감을 느끼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마치 재즈 연주가가 매번 다른 연주를 하듯이 저도 매번 다른 공연을 하는 셈이죠. 그런 작업들이 재미도 있고 제게 새로운 창작의욕을 돋구는 것 같아요.
작품을 그 해외 및 국내 각 지역에 공연을 하게 되면 그 나라와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입혀 재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지역의 현지 분위기, 생각 등을 미리 파악하고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는데 큰 효과가 있어요. 그런 작업들이 재미있어요.
그리고 저는 2020년까지 한 번도 공연활동을 쉰 적이 없어요. 그런데 2020년에 와서 코로나 때문에 큰 충격이 왔죠. 연기된 공연도 많고, 연습하다 말고 포기하는 것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거리두기 수칙을 지키면서 『유랑』 공연을 서울 외 지방에서 하고 있어요. 지금은 경기도 『유랑』 공연(2019년 5월29일 경기아트센터 소극장) 이후에 코로나19로 인해 좀 길게 쉬고 있어요. 하지만 쉬는 동안 작품을 지속적으로 지역 특성을 살리고 새로운 뉴스나 시사성도 약간씩 가미를 하면서 업그레이드 준비작업 중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윤무』에 지원 받아, 오랜만에 공연을 12월4(금)~5일(토) 오후8시 서강대메리홀에서 하게 됐어요. 그 작품의 안무를 새롭게 바꿔서 준비하고 있지요. 코로나19로 인한 공연 중단 시기에 거리두기 공연을 다시 재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무용수들과 스태프들이 활기를 찾았네요.
정기헌 _ 보통 재공연을 할 때 약간의 수정을 하거나 무대의 크기에 따라 손보는 정도인데, 박 선생님께서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열성적으로 작업하는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영미 선생님도 근황과 요즘 집중하고 계신 것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또 대학에서의 상황도 코로나19로 정상적이지 않겠지만 최근 학교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김영미 _ 저는 지금 스승께 배운 많은 것들을 제 후배들이자 제자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작년에 「대한민국 무용대상」에서 『페르소나Ⅱ』 작품으로 대통령상을 받았고 올해는 「이데일리 문화대상」에서 무용부문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2020 댄스비전」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습니다. 작품 하나로 과분하게 좋은 상을 받아서 올해는 감사한 한 해입니다. 늘 스승께서 끊임없이 공연하시고 활동을 하시니까 제자들도 당연히 열심히 하게 됩니다. 저도 매년 솔로, 군무 등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르치기 위해 공연하는 거지, 예술가로서 좋은 작품을 하려는 그런 욕심은 사실 없거든요.
정기헌 _ 너무 겸손하신데요. 작년에 상을 휩쓸어 받았는데도 그런 욕심은 없다니요.(웃음)
김영미 _ 작년에는 제가 운이 좋아 그런 것 같아요. 평생에 한 번 아닐까요?
(웃음) 스승님께서 갖고 있는 열정을 저도 갖고, 또 그 에너지를 학생들에게도 주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우리 학생들도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번에 「코리아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도 한 명이 군 면제가 되는 좋은 성과가 있었고, 「서울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도 우리 학생들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어요. 학생들도 똑같이 경희대 현대무용의 맥을 이어가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정기헌 _ 작품에 대해 겸손하게 말씀하셨는데, 예전에 ‘서울무용제’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었고 인상적인 무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영미 선생의 작품은 굉장히 묵직한 느낌으로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그리고 또 무용수로서도 현대춤 무대에 굉장히 귀한 독특한 몸의 라인을 갖고 계셔서 앞으로도 무대에서 쭉 만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배준용 _ 저는 ‘성남문화재단 미래전략부’에 근무를 하고 있고 지역축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서는 성남 문화예술 정책 수립과 지역 축제를 육성을 하는 일을 하고있습니다. 올해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인 만큼 시대 전환 포럼도 많이 열리고, 각 지자체에서도 그 이슈로 사업들이 진행이 되고 있어요. 저도 행정기관에 있지만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펼쳐질지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문화예술가들이 미리 대비를 잘 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정말 난관에 봉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일하면서 주로 그쪽으로 관심 가지고 있습니다.

『황조가』 등 고구려 신화 주제로 한 3부작으로 역사에 대한 진지한 관심
정기헌 _ 오늘 현대무용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도 나누겠지만, 시대별로 박명숙 선생님의 작품과 그 당시 현대무용의 분위기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박명숙 선생님의 작품 중 처음으로 기억하는 것은 1991년 『황조가』에요. 그때 공연을 보고 아주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춤을 잘 몰랐고 현대무용이라고 하면 그저 어두운 조명에서 답답한 움직임의 연속이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박 선생님의 작품은 정확한 정서와 분위기의 톤을 만들어서 서사구조를 선명하게 이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작품구성에 드라마가 제대로 이입되어 있었죠. 이어서 1993년도 『혼자 눈뜨는 아침』, 1996년 『에미』, 그리고 1999년 『유랑』까지 이어졌고, 제가 느끼기에 1990년대는 ‘박명숙댄스씨어터’의 춤이 만개했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후 작품 『윤무』에서 무대의 형식과 구성에 자유롭게 도전하는 젊은 춤을 만들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메시지의 흐름을 따라가는 작품이라고 느껴지는데, 편안하다고 한 것은 이전의 작품 『에미』, 『고구려의 불꽃』 등에서는 작품을 준비하는 것 자체에 물리적인 에너지가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 생각됩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궁금한 작품들의 몇 가지 작품들의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먼저 고구려에 관한 3부작에 대해서 입니다. 당시 어떻게 역사적인 시점에 관심을 가지시고 작품으로 접근을 하셨는지요? 1980년대 말, 춤의 무대에서 우리 것,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이 진지하게 무대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중에 어떻게 고구려를 배경으로 연작을 만들어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박명숙 _ 고구려 신화를 주제로 1989년 『그날 새벽』, 1990년 『고구려의 불꽃』, 1991년 『황조가』 이렇게 3부작으로 발표를 했어요. 제가 40대에 가까워지면서 민족, 국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 고구려에 대한 영감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특히 고분벽화를 보면 고구려시대에 말 타는 그림에서 기백이 느껴지며, 의상과 소품의 세련된 감각과 화려한 색상에 놀라움을 느꼈어요. 마치 고분벽화 속에서 살아나올 것 같은 ‘그림 속 사람들이 무용수라면 좋겠다’라는 상상을 했지요.
그래서 역사의 신화 탐구에서 현실의 내면 풍경을 무대에 표현하기 위해 먼저 남성 중심의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작품의 굵직한 소재에 적합하도록 남성적인 움직임과 함께 여성적인 아름다운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데 주목해서 3부작을 제작했어요. 이 당시에는 마침 훌륭한 남성 무용수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절이라 남성적인 작품이 가능했었네요.
고구려 시리즈 3번째인 1991년 『황조가』가 13회 「서울무용제」 대상과 함께 안무상, 연기상, 음악상, 미술상 등 모든 상을 다 받으면서 문화 예술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정말 기쁜 일이었죠.
정기헌 _ 신화 안에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있었겠군요.
박명숙 _ 네, 드라마뿐만 아니라 신화의 현대적 재조명이라는 좁은 이야기 구성으로 떨어지지 않고, 보편성과 현대성을 두루 갖춰 폭넓은 상상력을 자극을 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어요.
김영미 _ 저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그날 새벽』부터 출연을 했어요. 어렸을 때 작품에 출연하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 때는 남자가 없었으니까 남학생들은 재학생 때부터 출연을 했고, 여자들은 졸업하고 나서 겨우 작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 했죠. 우리는 옆에서 음악 틀고 도와주는 도우미를 하며 꿈을 꾸다가, 『그날 새벽』에 처음으로 선생님 작품에 군무로 출연하게 됐어요.
정기헌 _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당시 작품들 주제나 관점이 와 닿으셨나요? 20대 초반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이잖아요.
김영미 _ 어려웠어요.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그 작품을 하기 전에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내용을 알려주시고 설명해주셨어요. 사실 우리는 가장 어린 댄서였기 때문에 군무로 들어갔다 나왔다 했고, 선배님들이 주로 이끌어가셨죠. 우리는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어요. 제 기억에, 『그날 새벽』이라는 작품도 포스터부터 다른 학교 스타일과 아주 달랐어요. 제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상상력도 워낙 뛰어나고 모든 것에서 굉장히 앞서가셨어요. 그 때 포스터에 남자와 여자가 마주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스타일의 포스터가 없었어요. 그 포스터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새롭고 놀라웠죠. 그런 시대였어요.
박명숙 _ 무대가 회전하면서 돌아가고, 제가 앉아서 회전무대 가득 불을 붙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날 새벽』, 『고구려의 불꽃』, 『황조가』는 무대미술에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제작한 예술작품 그 자체였어요. 특히 깃발과 의상은 디자이너가 페인팅을 하면서 제작을 했어요. 그 하나하나가 다 예술 작품이죠. 가격으로 따질 수 없죠. 지금은 불가능하죠.
정기헌 _ 그렇죠. 당시의 열정이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던 시기였습니다.
김영미 _ 『고구려의 불꽃』에서 우리가 대나무를 들고 춤을 췄어요. 일명 ‘깃발춤’이라고 해서 군무를 했었는데요. 그 동작을 하기 전에 교수님이 우리에게 무술을 배울 수 있게 따로 워크숍을 마련해주셨어요. 남자 무용수가 없어서 제가 남자 무용수 역할도 했죠.
박명숙 _ 안무를 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형식의 움직임 개발을 위해 연기, 전통무용, 무술적인 춤사위 등의 워크샵을 진행했어요. 그리고 각각의 무용수들이 개성 있는 움직임과 에너지가 표출될 수 있었네요.

현대무용 대중화에 큰 공헌을 한 『혼자 눈뜨는 아침』
정기헌 _ 그런 준비가 지금도 재공연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다분히 남성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중반부터는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살피는 작품을 이어갔습니다. 작품속의 주인공이 겪는 삶과 기억의 흐름을 쫓는 형식이 등장했지요.
박명숙 _ 제 나이와 같이 평행선을 그리면서 갔어요.
정기헌 _ 그래서 『혼자 눈뜨는 아침』의 소설 원작이 박 선생님의 작품이 아니었나 싶어요.(웃음)
박명숙 _ 이경자의 『혼자 눈뜨는 아침』 작품에 주인공 나이가 저하고 똑같았어요. 제가 그 책을 반도 안 읽은 시점에서 이 책 제목 『혼자 눈뜨는 아침』 그대로 사용하면서 현대무용으로 만들기로 결심을 했어요.
정기헌 _ 『혼자 눈뜨는 아침』과 『에미』에 담긴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의지, 삶의 주관을 표현하거나 성취하는 것이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박명숙 _ 1993년 『혼자 눈뜨는 아침』과 1996년 『에미』을 통해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시작했어요.
먼저 『혼자 눈뜨는 아침』은 한창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등의 고민을 할 시기였는데, 그때 마침 『혼자 눈뜨는 아침』이라는 이경자 씨 소설을 읽고 큰 영감을 받고 무대에 올렸어요. 이 작품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아니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더라고요. 그만큼 이 작품은 무대에 올리는 순간까지 완전히 빠져있었어요.
그리고 이 작품은 현대무용 대중화에 큰 공헌을 했어요. 관객들이 현대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감동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 거죠. 그 영향으로 9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우수공연 레파토리에 선정되었고, 지역 순회공연을 할 때, 다수의 관객들이 ‘어렵다고 생각한 현대무용이 이런 감동을 느낄 줄 몰랐다’, ‘마치 대사가 없는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혼자 눈뜨는 아침』을 기점으로 마니아층이 늘어나고, 우리가 공연 한다고 하면 때와 장소를 구별하지 않고 꼭 와주셨어요. 저에게 있어 『혼자 눈뜨는 아침』은 참 고마운 작품이죠.
그리고 그 작품에서 무대미술이 아주 좋았는데, 손호성 씨가 디자인을 했죠. 무대를 쓰러질 듯이 서있는 가로등과노란 중앙선이 그려져 있는 아스팔트을 통해 내면(실내분위기)과 외면(거리풍경)을 표현했는데, 그 무대를 보고 주인공 여성의 정신세계와 현실을 넘나드는 이중의 장치로서 흑백의 장치와 조명이 어울리는 세련미를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았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 ‘문예회관’ 시절 무대 뒤 호리존트 막을 올리면 천장의 작은 방에서 무대로 연결되는 비상계단이 있었어요. 그 공간을 활용하여 냄비, 유리 등을 다 깨부수고 내려오는 장면으로 작품이 시작되었는데, 그때 제가 극적으로 가출한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내려오고 무대 위로 굴러 떨어지면서 비통한 솔로의 춤으로 이어나갔죠. 아직도 사람들이 『혼자 눈뜨는 아침』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해요. 그런데 그 계단과 방이 지금은 다 없어져서 좀 아쉬워요.
김영미 _ 『혼자 눈뜨는 아침』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인데, 사실 지금 봐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작품이에요. 샹송에 맞춰서 세 명의 여자 트리오와 무대 세트가 나왔는데, 현대무용에서 무대를 굉장히 미니멀하게 보여준 거였어요. 그 당시에 현대무용은 대부분 세트가 컸는데, 그 때 굉장히 미니멀하게 공간을 분할해서 무대를 썼죠. 또 소설을 가지고 안무를 했기 때문에 이해도 더 빨리 됐어요. 무대의 공간을 분할해서 한 쪽은 방을 만들고 다른 한 쪽에는 가로등을 둔 게 저는 가장 기억이 남는데, 그런 식의 무대는 그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어요.
정기헌 _ 공간 분할을 통해 시간과 정서를 가르는 영역을 만든 것이지요.
김영미 _ 네. 저도 지금 안무를 하고 있지만, 그 작품을 보면 공부가 굉장히 많이 되거든요. 사실 그 당시에 무대를 그렇게 분할해서 했던 좋은 작품들이 제 기억에는 별로 없어요. 그런데 그 작품은 굉장히 미니멀하고, 모던해요. 그리고 샹송에 맞춰서 춤을 춘 여자무용수 트리오가 굉장히 인상이 깊었어요.
그 작품을 몇 년 전에 충남대의 메타댄스컴퍼니에서 레퍼토리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순서를 알려주러 갔는데, 기억이 안 날 줄 알았는데 제 몸이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너무 신기했어요. ‘메타 댄스’ 단원들이 저보다 한참 어린데도 그 작품을 보고 옛날 작품 같지 않다고 굉장히 놀라워 했어요. 『혼자 눈뜨는 아침』은 지금 다시 각색을 해서 공연을 해도 좋은 작품입니다.
정기헌 _ 그 당시에 ‘컨템포러리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현대무용이 많았지만, 완성도 있게 공간, 연출, 춤이 하나가 된 작품이었죠. 그리고 굉장히 이질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들어갔고요.
박명숙 _ 제가 원래 디자인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무대 미술 뿐만 아니라 의상도 그렇고요. 그래서 그것들이 『혼자 눈뜨는 아침』이라는 작품 속 곳곳에 다 묻어있어요. 일반적이지 않은 특이한 동선, 샹숑 등 다양한 음악, 독특한 움직임의 안무를 했는데, 언젠가 다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드라마, 서사, 춤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 『에미』
정기헌 _ 꼭 다시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에미』가 박명숙댄스씨어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드라마, 서사, 춤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있었죠. 작품 속에 인상적인 씬이 많았는데 마지막 장면의 대나무 숲, 중간에 장례식 등이 하나하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배준용 선생님도 『에미』와 『유랑』이 나중에 재연될 때 출연도 많이 하셨죠?
배준용 _ 제가 처음으로 공연하게 된 작품이 『에미』에요. 제가 그 당시에 고등학교 입시시절에 많은 현대무용 공연을 봤었는데 난해하고 어려운 작품들만 보다가 스토리가 쉽게 보이는 『에미』를 보고 큰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무용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희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제 또래 사이에서 경희대가 참 인기가 많아서 경쟁률이 높았어요. 1998년에 경희대에 합격을 했는데 제가 운이 좋았나봐요.
김영미 _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던 기억이 나네요.
박명숙 _ 공부를 잘 했어요.
정기헌 _ 무대에서 무용수로도 좋은 모습을 보였죠.
배준용 _ 남자 무용수라는 이유로 『에미』라는 작품에 남들보다 일찍 출연했어요. 『에미』 작품 중에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할머니와 소녀가 바뀌는 장면이에요. 말로 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되고, 지금도 그 장면이 가장 좋아요. 명확한 스토리가 보이는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대나무 숲이 나오잖아요? 관람만 했을 땐 몰랐는데, 무대가 참 멋있었어요. 누가 봐도 공연의 정점을 찍는 장면이죠. 하지만 관객들은 무대를 보고 희열을 느끼지만, 그러한 무대를 준비하려면 스태프, 출연자 등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대나무를 일일이 다 꽂고 나르고 해야 되요. ‘그 하나의 만족스러운 장면을 위해 이렇게 많은 무용가들이 무대 뒤에서 고생하는구나’ 싶었어요. 하여튼 『에미』라는 작품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죠.
김영미 _ 저는 『에미』에 출연도 했지만, 초연 때는 조안무에도 참여했어요. 그때 제가 임신한 상태였지만, 무대에 너무 오르고 싶어서 제가 부탁을 드렸어요. 그 당시에는 임신을 하면 무대에 서지 않았는데, 제가 걸어가는 장면 하나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대본에 원래 있었는지 아니면 그 씬을 만들어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임산부 씬이 있었어요. 그 시점에 제가 임신 9개월이었으니 거의 만삭이었지만 그 씬을 하게 됐죠. 그때가 1996년도였으니 임산부가 배를 드러내놓고 춤을 춘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던 시대에요. 그런데 제가 제 의상이 안에 살색 옷에 겉에 탑을 입고 흰바지를 입었는데, 배가 안 보이니까 이걸 벗으라고 하셨어요. 사실 임산부들이 배를 잘 안 내놓으려고 하는데 그 때 배가 예뻤어요.(웃음)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배를 내놓고 춤을 췄죠. 사람들이 ‘저 배 가짜야, 진짜야? 배꼽도 만들었네?’ 하면서 관객들이 내기를 하기도 했구요. 또 배가 조명을 받으니까 뱃속에서 아기가 움직였어요. 같이 춤을 춘 거예요. 그래서 그때 배를 내놓고 춤추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 있는데, 요즘은 임산부들이 다 배를 내놓고 기념사진 찍잖아요. 그런 걸 보면 우리 교수님이 얼마나 앞서가셨는지….(웃음)
정기헌 _ 그 당시에는 무대 위에서 그런 장면을 보기 어려웠죠. 해외 유명연예인의 퍼포먼스에서나 가능했을 모습인데 무대 위 특별한 모습이었습니다. 작품 속에 소녀에서 할머니가 되는 과정이 담겨있는데 임신한 여성의 모습이 들어갔으니 작품의 전개가 더욱 충실졌습니다.
최근 박명숙 선생님의 인터뷰에서 “서울에서 몇 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그 시간을 거치면서 살아왔나” 주목한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현대춤은 동시대를 표현하는 언어인데, 서울을 대표하는 현대무용단이 존재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었습니다. ‘서울현대무용단’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피나 바우쉬가 부퍼탈이라는 공업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작품의 메시지를 확장시켜 나간 것처럼 말이죠. 재미난 것들을 많이 만들어냈잖아요.
박명숙 _ 서울현대무용단이 그 후에 ‘서울댄스씨어터(SDT)’로 명칭이 바뀌었어요.
정기헌 _ 서울의 현재를 담는 춤집단이란 점에서 좋은 네이밍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얘기할 작품은 1999년 『유랑』입니다. 이 작품이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고, 현재까지도 재구성을 통해 수정보완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랑』도 서사적인 구조를 통해 우리 민족의 한 흔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에미』의 드라마틱한 분위기와는 다른 공간의 흐름이 더해져 있는 작품입니다. 지나간 시간이 액자에 담긴 것처럼 인물들이 군상을 이룬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유랑』을 구상한 배경은 어떤 것인가요?

『유랑』은 서사적인 구조를 통해 우리 민족의 흔적을 추적
박명숙 _ 과천 현대미술관에 신순남 화백의 전시가 있었는데 그 전시를 보고 제가 충격을 받은 거죠. 그 거대한 전시장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전체가 한 작품이에요. 그 지역에서는 피카소보다 더 유명한 신순남 화백 작품을 보면서 이것을 현대무용 작품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탄생과 죽음, 결혼식과 장례식, 슬픈 일과 기쁜 일 등 모든 이야기가 이 그림 속에 있는데, 선이 어찌나 굵고 강한지 소름이 끼쳤어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죠. 이 그림을 무용 작품으로 옮기자고 생각하고 신 화백의 전집을 사서 보기 시작했죠.
그리고 1999년 『유랑』 첫 장면은 한 노인이 전시장 관람객 역할로, 지팡이 짚고 모자 쓰고 객석에서 무대 위에 올라오면서 시작되지요.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이 살아나오면서 옛날 무성 영화나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는 듯한 장면입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소련 연해주 거주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강제이주, 유폐되었던 역사적 비극을 모티브로 할머니, 할아버지, 아기, 다양한 역사 속 인물, 다양한 직업군, 사랑하는 연인 등의 이야기로 라이브 음악과 함께 7개의 장면으로 풀어 나갔죠. 그리고는 각 인물들은 무대의 풍부한 서사를 간직한 채 그림 속으로 다시 사라지면서 새 가 되어서 날아가요. 고난의 역정과 끈질긴 생명력을 형상화한 장면이죠.
정기헌 _ 초연이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 장면에 무용수들이 흰 옷을 입고 새가 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요. 저는 한명희 선생을 따라서 우즈베키스탄을 두 번 다녀왔는데요, 그곳의 교포사회 모습이나 위문공연을 통해서 느꼈던 부분이 『유랑』이라는 작품을 미리 보았기 때문에 더욱 직접적이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카자흐스탄 알마티와 같은 도시에서 공연을 하면 좋겠군요. 소련에 의한 강제열차에 사람을 태워 카자흐스탄의 시골도시 ‘우스토베’라는 곳에 처음으로 이주민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곳을 가보니 고려인 4세인 분들이 아직 우리전통을 생활 속에 담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박명숙 _ 언젠가는 우즈베키스탄 같은 곳에 가서 공연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더 감동적일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와 미술, 영화, 음악, 논문, 기사까지 엄청난 자료를 보면서 고려인의 애환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유랑』을 안무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김영미 _ 저는 『유랑』 초연 출연자였어요. 주역을 주셨어요. 제가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가, 어둡고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야 되는 두려움을 표현하는 장면이에요. 교수님이 안무하실 때의 특징이 텍스트를 던져주시면서 댄서들이 할 수 있게 끄집어내주시거든요. 제가 사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닌데, 어떤 배역을 맡으면 타고난 끼는 없지만 제가 몰랐던 저의 모습을 교수님께서 끄집어내 주시더라고요. 제가 솔로로 해야 되는 씬이 있었는데, 장님 역할이어서 눈을 감고 어두운 곳에 두려움을 갖고 가야하는 장면이어서 제가 상상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어딘가에 혼자 남아 갇혀있는 걸 상상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그 씬을 만들어냈어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연극적으로 표현했고 그걸 리허설 할 때 처음 보여드렸는데, 교수님도 그렇고 다른 스태프들도 깜짝 놀라셨어요.
박명숙 _ 그렇게 해낼 수 있는 무용가는 드물어요.
정기헌 _ 김영미 선생님이 눈을 가리고 움직이면서 떨림을 표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김영미 _ 저 역시 그 씬이 기억이 많이 나요. 저는 제가 재능이 없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배역을 주시면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리고 제 작품이 아니라 스승님의 작품이니까 출연할 때 부담감도 없잖아 있고요. 『에미』 때도 그랬고, 어떤 역할을 주면 이걸 잘 소화해야 작품이 빛이 날 수 있고, 내가 잘못해서 작품에 누가 되면 안 되니까요. 그런 부담감도 있었는데 이제야 말씀을 드리네요.(웃음)
박명숙 _ 처음 듣는 얘기에요.
김영미 _ 그래서 저는 늘 앉아있질 않았어요. 제 역할 하기 전에는 항상 서서 연습하고 집중했는데, 그 덕분에 제 춤 실력, 표현력이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저도 몰랐어요. 그런데 하게 되더라고요.
정기헌 _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냥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군요. 배준용 선생님은 기획 일을 하시는데, 『유랑』과 『에미』 이 작품들을 가지고 타슈켄트로 갈 수 있겠습니까?(웃음) 행정 일을 하시니까 좋은 기획으로 그런 기회가 왔으면 좋겠군요.
배준용 _ 네. 언젠가 그런 일이 생기면 좋겠네요.
정기헌 _ 참고로, 타슈켄트의 ‘나보이 극장’과 카자흐스탄 옛 수도 알마티의 국립극장은 너무나 멋진 무대가 있습니다. 앞에서 보이는 무대면적의 5배 크기의 백스테이지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기에, 낡고 허름하지만 극정의 구조는 굉장히 훌륭합니다. 그리고 2차대전 중에 러시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을 상대적으로 안전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동시켰고 그때 수준있는 미술교육이 이루어져서 신순남 화백도 그런 배경 속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박명숙 _ 정말 존경스러운 신순남 화백의 개인전을 다시 보고 싶네요.

시대를 앞서갔던 VR 공연 『시간과 방을 위한 네 개의 풍경』
정기헌 _ 지금부터는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신작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박명숙 _ 네. 앞으로 신작 준비를 천천히 하려고 해요. 요즘 코로나 덕분에 생각이 난 건데, 작품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영화관에서도 관람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나루아트센터’에서 VR 공연 『시간과 방을 위한 네 개의 풍경』을 2016년 8월20~28일에 했었는데요. VR 촬영을 위해서 좋은 기자재들을 총동원해서 한 달 동안 전시장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 때가 코로나와 관계없는 시기였는데도 대성공이었어요.
정기헌 _ 지금 같은 언택트 시기에 더 필요한 공연이겠군요.
박명숙 _ VR 공연의 경험을 살려 다시 제작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는 단순한 기록용 비디오 촬영이 아니라, 이제는 마치 ‘엔티 라이브’처럼 해야 돼요. 국립극장의 ‘엔티 라이브(NT Live: National Theatre Live)’는 실제 공연보다 더 감동을 주더라고요. 특히 저렴한 티켓 가격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 영상이 영상 기법이나 연출, 영화 감독, 안무가 등이 다 엮어져서 나온 산물인데, 결과물이 정말 완벽해요. 코로나가 같은 재난 상황들이 앞으로 지속될 것 같은데 그러한 상황을 대비해서 댄스 미디어 작업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진행 할 생각입니다. 또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없는 댄스 미디어 작업을 통해 국내외 많은 사람들도 쉽게 관람하길 원해요.
또 앞으로는 무용 전문 극장이 많이 생기면 좋겠는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무용은 오프라인 정서가 깃들어야 하는데 무용장르 특성상 비대면 공연은 현장예술 특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코로나에 영향을 받지 않는 특수한 전문 극장을 정부에서 따로 만들기 희망합니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없는 댄스 미디어 작업을 진행할터
정기헌 _ 지금 현장은 너무 힘든 상황입니다. 개인 안무자들은 작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이 2~3년 지속되면 코로나가 끝났을 시점에는 커리어를 만들어야할 전문무용수의 단절이 생기고, 춤의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에 덧붙이자면 영상을 위한 춤, 댄스필름을 빨리 도전해야 합니다. 코로나19가 아니어도 댄스필름에 젊은 무용가들이 도전했어야 했는데, 어려운 시기인 만큼 빠르게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내에 4천만 명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작업을 한다면 새로운 영상안무가가 집단이 등장해서 춤이기에 가능한 메시지와 몸의 가능성을 표현해 낼 것입니다.
박명숙 _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곳곳에서 움직임들이 일어나고는 있는 것 같아요.
정기헌 _ 현재 무용가는 영상에 취약하고 영상분야에서는 춤을 모르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TV에서 편하게 보는 예능프로그램에 40대의 카메라가 기록을 해서 굉장히 스피드 있게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영상 소비자 입장에서는 현재 수준의 댄스필름을 지루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엔티 라이브도 정교한 영상표현을 위해 많이 비용이 투자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명숙 _ ‘엔티 라이브’와 같은 프로젝트는 많은 예산이 필요한데 현실은 어렵잖아요. 단순 기록용 영상도 예산이 없어서 촬영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기술을 이용해서 어떻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가 관건
배준용 _ 그 부분이 정책으로 많은 정보가 오고 있는데요. 축약해서 말하자면, 그런 스마트 기술들을 이제는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제는 유명 음식점들도 배달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기술과 예술을 접목시켜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기술을 이용해서 어떻게 서비스를 제공할지 그 관점에서 접근해야 기술을 더 잘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기술이 많이 발전한 신기술을 어렵게 접목하여 예술을 어렵게 느끼게 되버린 경우가 많잖아요?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관객들한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생각으로 하면 쉬운 방식의 기술 접근성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죠.
영상 관련된 기술들도 급속도로 발전되었는데 그에 따른 새로운 문화도 생기고 있죠. 짤방, 밈 등 영상을 접하는 플랫폼이 바뀌며 생겨난 신조어이죠. 이것은 유튜브 플랫폼의 영향이 큰데 요새 유튜브를 엄청 많이 봐서 기존 방송들은 무너지고 있어요. 유튜브 자체가 콘텐츠가 되고 있구요. 이 또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쉽게 원하는 콘텐츠를 시간에 제약없이 서비스를 할까? 라는 것에서 시작이 되었죠. 이렇게 서비스를 생각하면 영상이든, 영화든 최신 기술과 접목하여 파급력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이건 아이디어 하나로 시작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무용가들이 최신 기술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 부딪히고, 관객들엑 서비스 차원으로 접근을 한다면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제가 박명숙 선생님께 크게 배운 것 중 하나는 항상 새로운 시도를 겁내지 않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VR도 제가 정말 좋아했던 기획 프로그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시대를 너무 앞서갔어요.(웃음) 왜냐하면 VR 공연 제작을 2016년도에 제작했었는데 하필 ‘창의경제’ 만든 정권의 큰 문제가 터지면서 VR, AR 시장이 확 죽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급속도로 VR, AR 시장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네요. 2019년에 했었으면 엄청난 이슈가 됐을 거예요.(웃음) 아무튼 이런 시도들이 다 돈을 벌거나 성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였죠.
지금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20~30대들도 부와 명예가 아니라 재미난 시도를 몸으로 부딪쳐서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미 _ 요즘 공연이나 젊은 친구들의 작품을 보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트렌드 변화가 너무 빠르고 순수예술인 춤에 대한 사유와 본질보다는 외형적으로 보여 지는 것들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들 들 때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춤을 추면서 가장 큰 고민이 어떻게 무용을 대중화 시킬 것 인가였습니다. 왜냐하면 무용이 다른 예술에 비해 일반관객의 빈도수가 적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견해들이 많이 때문이에요. 무용이 활성화가 되려면 대중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건 누구나 알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생각하는 부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면 예술성보다는 쉽고 편안하게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저는 예술성과 대중성이 함께하는 작품들에 대한 고민을 안무가들이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랑』이나 『에미』처럼 예술성 있고 대중성 있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어져야 하고 고비용 저효율의 무용공연 구조를 생각하면 다작의 창작도 중요하지만 좋은 작품의 레파토리 공연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차산업혁명시대에 앞으로 많은 분야와 직업들이 바뀌고 사라진다 해도 무용예술만큼은 살아남을거라 생각하고 무용이 가지고 있는 춤의 본질만큼은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코로나19로 무대가 얼어붙은 지금이 바로 춤의 본질에 대해 집중해야 할 시기
정기헌 _ 요즘 코로나19로 무대가 얼어붙은 시기이니 춤의 본질에 대해 집중해야 할 시기로 생각됩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현재 무용 사회는 현대무용, 한국무용, 발레로 구분된 대학 중심의 무용단이 활동의 주를 이루고, 일부 독립무용단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시기에 비대면, 언택트로 대학과 교육기관의 학습이 진행되는 현황을 보니 코로나 이후 대학의 모습이 기존의 역할과는 달라질 수도 있겠다 생각됩니다. 더구나 무용과의 성장과 전문무용수의 배출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 가장 대학입학인구가 많았을 때 이루어 졌습니다. 앞으로는 뭐가 달라도 달라져야 겠구나 생각을 해보는데요. 박명숙, 김영미 선생님 두 분께서는 대학에 오래 계셨으니 대학 무용과는 어떻게 변해야 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물론 쉽게 한마디로 정리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앞으로 5년, 10년 뒤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논의해 봐야할 시점입니다.
박명숙 _ 제가 경희대 퇴직 전에 『ARDAMU 페스티벌』을 만들었어요. 무용과, 음대, 미대가 같이 미술, 무용, 음악 융합 공연을 한 것입니다. 같은 대학교에 있지만 각 분야별로 서로 교류 없이 따로 작업하므로 만나게 해주고 싶었어요. 미대 조각, 회화, 음대 작곡과, 현대무용 창작하는 학생들이 같이 공동 작업을 위한 수업도 매해 한 학기씩 진행했어요. 다양한 학생들이 함께 제작과정을 진행해 나가는 창작 수업을 통한 결과물로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갤러리에서 미술 조형물을 셋팅하고, 라이브 연주와 현대 무용이 함께 어울러져 하나의 훌륭한 융합 퍼포먼스가 탄생이 되었죠. 이렇게 3개의 대학이 함께 만들어나간 것이 경희대 역사상 처음진행이 된 것이랍니다.(웃음)
이때 참여했던 학생들과 관람했던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어요. 이렇듯이 다양한 예술분야의 전공자들이 만나 새로운 프로젝트 작업을 하면 할수록 새로운 창의적 사고가 성장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직업 창출이 발생되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수의 다양한 예술가들이 따로 작업하기보다는, 만나서 공동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은 한두 가지 이상의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데, 이는 다양한 전문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술가는 타 예술 장르와 함께 철학, 과학, 역사, 교육, 사회학 등 다양한 지식을 쌓아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죠.
앞서 김영미 교수가 얘기한 것처럼,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는 예술 분야는 무용이에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자신이 어떠한 생각을 통해 어떻게 움직임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지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몸으로 효과적인 자기표현 방식을 하려면 움직임에 대한 연구를 안 할 수가 없죠. 그러다 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기도 하죠. 결국은 모두가 각자 안무가, 무용가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결국 모든 사람들이 생활 속에 교육자, 무용가, 안무가, 댄스테라피스트(Dance Therapist) 등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퇴직 이후 조각가, 사진작가, 화가, 영상제작자 등 제2의 직업을 갖는 이 시대에 무용을 접목하면 더 다양한 직업이 생겨납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직업과 개성이 넘치는 직업을 개발 및 활동 할 수 있게, 대학에서 격려해주고, 여러 분야를 다 섭렵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과정이 필요합니다. IMF 때 많은 무용가가 예술 활동을 다 포기한 상황이 왔을 때 슬픈 일이지요. 그 일을 경험을 삼아 코로나로 인해 심각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다양한 직업 개발이 필요합니다.
무대디자이너였던 조셉 나주(Josef Nadj)는 무대 세트 제작하다가 안무가가 되었는데, 그의 작품은 무대 세트와 움직임이 완벽하게 일치가 되는 독창적인 안무법을 구현하죠. 이것은 오래된 삶의 경험을 통한 자신의 개성을 살리면서 아무도 할 수 없는 독창적인 안무법을 개발한 좋은 예입니다. 이렇듯, 각자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너무 유행을 타는 것 같아요. 하나가 유행하면 다 그쪽으로 몰려가는 사회 현상이 있죠. 무용도 다르지 않아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사회분위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술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중장년 예술가와 젊은 예술가의 끊임없는 소통과 교류가 필요한데, 그런 기회가 전혀 없네요. 춤지에서 공연이 있을 때 서로 소통하고 만날 수 있게 재미난 일들을 꾸며주시면 어떨까 싶어요.(웃음) 춤 잡지에서도 좋은 일들을 많이 꾸며주시면 좋겠어요.(웃음)

예술가는 타 예술 장르와 함께 철학, 과학, 역사, 교육, 사회학 등 다양한 지식을 쌓아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어
김영미 _ 우리가 학교 다닐 때부터 이 말씀을 늘 하셨어요. 사실 순수예술 하는 사람들은 한 곳만 보잖아요. 저도 한 곳만 보는 사람인데요. 그런데 요즘은 학생들 상담을 하다보면 하면 무용을 플랫폼으로 사용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요즘 무용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 무용을 플랫폼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찾으라고 말해줘요.
아까 모든 것들을 무용에 붙일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씀이 맞거든요. 다른 분야와 연결하기 가장 좋은 게 무용이에요. 모든 분야에서 플랫폼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용이더라고요. 제 제자 중 한 명이 가구 매니저였는데, 제가 그 제자에게 건축과, 디자인과도 안 나왔는데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무용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하더군요. 가구는 몸과 일치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매치가 되더라고요. 그 때 제가 교수님 말씀이 맞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무용을 플랫폼화하면 또 다른 프로그램, 또 다른 콘텐츠가 가능해요. 아까 말씀하신 것들이 답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그 얘기를 학생들한테 많이 해줘요.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할 수 있게끔 학교에서 도와줘야 하고요. 요즘은 무용만 하려고 하는 학생들은 많지 않더라고요. 춤을 출 수 있는 사람들은 춤 출 수 있게 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무용을 베이스로 해서 다른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무용을 통해 다방면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엔 무대에 서고 작품을 통해서 내 목소리를 낼 것
배준용 _ 저는 이 혼란한 시기에 말하고 싶은 게, 무용의 본질은 ‘정신’인 것 같아요. 외형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요. 옛날에는 무용과 무용 정신을 같이 배워야한다고 했어요. 특별한 움직임이 있어서 언어가 필요 없이 공감할 수 있는 게 무용이잖아요. 하지만 지금 미디어 관련 무용작업들을 보면 화려함에 많이 치우쳐있어요. 생각을 해보니 옛 무용가들처럼, 큰 움직임 없이도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숙련된 것들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너무 새로운 것만 집착하지 말고, 외형적인 것 보다 내면적인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런 것을 학교에서도 놓치지 않고 가르쳐주면 좋겠습니다.
김영미 _ 생각과 마음으로 춤을 추라고 스승님들이 얘기했는데, 그게 가장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그 에너지가 영상을 뚫고 전해지더라고요.
박명숙 _ 저는 살아있는 동안엔 무대에 서고, 작품도 하고,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한평생 무용인으로 살아오면서 마지막까지 무용인으로 제 소임을 다 하고 싶은 거죠. 작품을 통해서 내 목소리를 내고, 후학들도 응원해 주고, 젊은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 작품도 만들어보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나이 든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될 수 있도록 「춤」지에서 많이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정기헌 _ 오늘 박명숙 선생님과 ‘서울댄스씨어터’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코로나 시대와 어떤 인재가 무용계에게 필요한지 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박명숙 선생님을 곧 무대에서 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