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지난 10월26일 팬데믹 와중에도 기쁜 일이 생겼다. 내가 사는 동네의 한강변인 장항습지에 멸종위기종 1급인 황새가 찾아왔다. 그 소식은 18년째 장항습지를 매주 월요일이면 모니터링하고 있는 민간단체 에코코리아 한동욱 이사의 「고양신문」 에코톡 칼럼을 통해 널리 전해졌다.
우리나라의 야생 황새는 텃새로 살아가는 개체군과 대륙을 이동하는 개체군으로 나뉜다. 여름철 아름드리 큰 소나무 꼭대기에서 번식하던 황새는 텃새 개체군인데 1970년대 이후 농약과 밀렵으로 절멸하고 말았다고 한다. 충북 음성에서 마지막으로 둥지를 틀었던 텃새 황새부부는 밀렵꾼에 의해 수컷이 희생당한 뒤 암컷마저 후사 없이 동물원에서 죽고 말았고 이동 개체군 또한 겨울철에 간혹 습지에서 보이는 정도라 너무 귀해서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장항습지를 모니터링 해온 에코코리아의 시민모니터링단에서는 철새의 생태환경을 위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 논에 물을 담아 얕은 습지로 만드는 ‘묵논’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급기야 올해에서야 그 제안이 수용돼 가을 묵논이 조성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묵논이 만들어지자 재두루미의 놀이터인 줄만 알았던 장항습지에 두텁고 긴 부리에 부리부리한 눈동자의 황새가 커다란 위용을 자랑하며 겨울을 지내러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황새도 쉴 만한 공간을 마련해주니 먼먼 시베리아에서 찾아오는데 과연 예술생태계 안의 창작공간과 제작 환경은 어떤 환경인지 되짚어보는 시간이다.1)­

최근에 「신나는 예술여행」 모니터링을 다녀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취약층 대상 예술향유를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신나는 예술여행」도 해를 거듭하면서 유형이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엔 전문예술단체 중심의 공연이나 전시 체험 프로그램 등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엔 ‘청년 일자리 창출형’, ‘사회적 가치형’ 등으로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내가 간 곳은 은평구 대림시장 골목의 낡은 건물 2층과 3층을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푸른학교 지역아동센터였다. 그곳은 수년 전 은평구의 ‘신나는 애프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인력, 재정 부족으로 열악한 환경의 지역아동센터를 지역의 개인 후원자, 재능 기부자, 기업 후원자와 공동협약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자치구에서는 시설비와 운영비를 지원해 청소년들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날 프로그램을 진행한 「신나는 예술여행」팀은 협동조합 문화예술공연단 꾸마달(‘꿈꾸는 아이들’을 줄여서 소리나는대로 읽다가 생겨난 말인데 꿈꾸는 아이들이라는 의미를 담아 만들게 되었다고)로 지역아동센터 졸업생 5명으로 구성된 단체였다.
「신나는 예술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단체 중 유일한 지역아동센터 출신 청년들이 만든 꾸마달의 무대는 마치 선배들이 지역아동센터 모교에 와서 후배들을 위해 공연을 하는 환대와 우정의 무대가 되었다. 노래를 소개할 때마다 아동학대 신고까지 받아 본 청소년이 있는 지역아동센터 특성을 마음으로 깊이 공감하고 응원하는 메시지가 섬세하게 전달되었다.
프로그램 중에는 지역아동센터 내 학생들 중 무대에 오르고 싶은 청소년을 호명하여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내용도 있었다. 공연을 하러 온 1세대 지역아동센터 졸업생이 만든 예술단체인 꾸마달이 롤모델이 되어 몇 년 후면 2세대, 3세대의 또 다른 ‘꾸마달’이 태어날 수 있는 선순환이 상상되기도 했다. 특히, 꾸마달은 전국 지역아동센터 홍보대사로 자신들이 청소년시절을 지낸 지역아동센터로 찾아가 그들의 경험을 나누며 연대와 지지를 보내니 여느 단체의 형식적인 프로그램과는 달리 프로그램 내내 활기와 훈훈함이 넘쳤다. 또, 초청 주체인 푸른학교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은 프로그램 내내 그들이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으리라.
청소년 사각지대를 돌보기 위해 마련된 지역아동센터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지만 2004년에서야 비로소 법제화되어 만들 수 있었다. 협동조합 문화예술공연단 꾸마달 청년들이 바로 그 시절 청소년기를 보내고 예비사회적기업의 일원으로 보란 듯이 공연이나 체험활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멤버 중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면서 공연 활동도 하고 지역아동센터에서 봉사하는 청년도 있었다. 경험이 미래를 만든 사례이다. 만약 지역아동센터라는 곳이 없었다면 협동조합 문화예술공연단 꾸마달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이제, 우리나라 공연예술 생태계의 안부를 확인한다. 남산예술센터가 서울시가 임대하고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한 지 11년 만에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남산예술센터인 드라마센터는 한국 연극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극장이다. 극작가 겸 연출가인 동랑(東朗) 유치진이 미국 록펠러재단의 지원과 한국 정부 토지 불하를 토대로 설립한 극장으로 1962년 당시 최신 현대식 극장으로서 창작극 요람 역할을 했다. 이후 운영난에 제작극장 위상을 잃어버리고 대관극장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중 2009년부터 서울시가 동랑예술원에 매해 10억 원을 내고 임대해 서울문화재단이 공공제작극장으로서 꼴을 갖춰 다양한 실험을 펼쳐 왔음에도 서울시도, 문화관광부 어디에서도 운영 의지를 보이지 않아 또 하나의 공공제작극장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남산에 있는 동랑예술원(옛 서울예대 부지)에 아이돌 육성을 목적으로 한 ‘SM인스티튜트(SMI)’가 들어설 예정이다. SMI는 비어있는 심재순관에 들어설 예정이라고 남산예술센터 폐관과는 무관하다고 하고 있으나 실습과 공연무대가 필요한 특수성을 고려할 때 남산예술센터는 공연창작과는 무관한 공간으로 바뀔 개연성이 높다.

쓰지 않는 논에 얕게 물을 대어 가을묵논을 만들어 놓으니 18년 만에 장항습지에 황새가 날아오고 지역아동센터 역사 16년 만에 졸업생으로 구성된 예비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예술단체도 만들어지고 있음에도 역사가 남다른 공공제작극장 하나 지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암담하다. 코로나19로 인한 참담한 현실에도 일부 지자체나 지원기관에서는 지원금 정산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연말로 기한을 둔다든가, 코로나가 진행 중인 2021년을 반영한 새로운 지원사업 모델이 아닌 예년 그대로의 지원사업 공고문은 창작의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다. 세계는 2030년까지 UN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각 분야에 적용해 전환하고 있고 다른 사회 분야도 진화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예술생태계는 어떤 실천계획을 가지고 2021년을 맞이하고 있는가? 지속가능성을 위한 약속이 절실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