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어느새 한해를 마무리합니다. 올해 마지막 이야기가 되겠네요. 이야기에 앞서 시 한 편 읽도록 하겠습니다.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산속의 스님이 달빛을 탐하여
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절에 다다르면 비로소 깨달으리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병을 기울이면 달 또한 비워짐을

누구의 시인지 아실런지요? 고려 때 문신이고 문인이며, 경전(經典)과 사기(史記) 그리고 선교(禪敎)를 섭렵한 명문장가로 당대 및 후대에 이름을 떨친 사람.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 등을 남겼고, 「동명왕편(東明王篇)」이라는 대서사시를 쓴 사람. 혹자는 ‘광세(曠世)의 문인’으로 혹자는 ‘시대의 아부꾼’으로, 후대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사람. 이쯤하면 아시겠지요. 바로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1168~1241)입니다.
위의 시는 그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나오는 「영정중월
(詠井中月)」이라는 시입니다. 보통 영정중월이라 부르지만 동국이상국집에는 “산석영정중월(山夕詠井中月)”로 나옵니다. 우리말로 풀면 “저녁 때 산속에서 우물에 비친 달을 읊네” 정도 되겠지요. 시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어떤가요? 산속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우물에 비친 달을 보고 그 달빛에 반해 달과 함께 물을 길어 병에 담아서는 산사로 돌아가지만, 막상 절에 도착해서 병의 물을 따르면 달도 달빛도 이미 다 사라짐을 문득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이규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정작 무엇일까요? 달(빛)마저 색(色)인 것이니 한갓 공(空)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겠지요. 그야말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불가의 깨우침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런 이규보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야말로 극명하게 갈립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규보를 이렇게 혹평합니다.
“이규보로 대표될 수 있는 무인정권하의 기능적 지식인은 권력에 대한 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며,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카무플라지한다.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지식인들은 국수주의자가 되어 외적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여 속으로는 권력자에게 시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간다. 그가 입신출세하는 한, 세계는 여하튼 태평성대다.”

한편 국문학자 조동일은 이규보를 이렇게 옹호합니다.
“이규보를 낮게 평가하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벼슬을 해서 생계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권에 참여해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 잘못일 수 없다. 무신란이 중세전기를 파괴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규보는 중세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저는 이규보에 대한 평가에 있어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외국인으로서 최초로 국문학 박사를 받은 故 케빈 오록 신부(지난 10월 23일 80세의 나이로 선종)의 평가입니다. 생전에 케빈 오록 신부는 서울신문(2014년 5월 14일자)과의 인터뷰에서 이규보를 일러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규보의 시는 중국의 두보나 소동파를 능가하는 좋은 시다.”

오늘은 맨드라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너무 길게 옆길로 샜습니다. 이쯤해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지요. 이규보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실은 우리나라 기록에서 ‘맨드라미’가 처음 등장하는 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고(이 부분은 제가 아는 한 그렇다는 것인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또 이규보가 맨드라미를 소재로 열 편 이상의 시를 남긴 까닭이기도 합니다. 맨드라미를 소재로 한 이규보의 시 중에 이렇게 더럽게(?) 재미있는 시가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鷄已化花艶(계이화화염) 닭이 이미 꽃이 되어 곱고 예쁜데
云何在溷中(운하재혼중) 어이해 더러운 뒷간에 피었나
尙餘前習在(상여전습재) 아직까지 전생의 습관이 남아서
有意啄蛆蟲(유의탁저충) 구더기를 쪼아 먹을 생각인 게지

시 제목이 “詠厠中鷄冠花(영측중계관화)”입니다. 우리말로 풀면 ‘측(厠)’이 뒷간이란 뜻이고, ‘계관화(鷄冠花)’가 맨드라미를 가리키는 말이니 “뒷간에서 볼일을 보다가 맨드라미를 읊다” 정도가 되겠지요. 시인이 뒷간을 가다가 뒷간 옆에 핀 맨드라미를 보았던 것인데, 하필이면 왜 더러운 뒷간일가 생각하다가, 그 이름 계관화(鷄冠花)에 이르러 전생에 닭이었으니, 닭이었을 때의 습관이 남아서 꽃이 되어서도 구더기 쪼아 먹겠다고 뒷간에 피었구나, 그리 읊은 것이겠지요.
맨드라미를 모르실 까닭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쯤해서 맨드라미는 어떤 꽃인지 알아봐야겠지요. 두산백과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쌍떡잎식물 중심자목 비름과의 한해살이풀이고, 학명은 이다. 계관(鷄冠)·계두(鷄頭)라고도 한다. 열대 인도산이며 관상용으로 심는다. 흔히 붉은빛이 돌며 털이 없다. 꽃은 7∼8월에 피고 편평한 꽃줄기에 잔꽃이 밀생하며, 꽃색은 홍색·황색·백색 등이다. 편평한 꽃줄기의 윗부분이 보다 넓어지고 주름진 모양이 마치 수탉의 볏과 같이 보인다. 꽃은 지사제로 약용하거나 관상용으로 이용한다. 꽃말은 ‘열정’이다.”

맨드라미의 영어 이름은 ‘cockscomb(닭의 벼슬)’이고 중국에서는 계관화
(鷄冠花)로 일본에서는 계두화(鷄頭花)로 불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맨드라미 외에 닭벼슬꽃, 달구벼슬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이름에 전부 닭의 벼슬이 붙은 것을 보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맨드라미의 모양새가 닭의 벼슬처럼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런 닭 벼슬처럼 생긴 모양새 때문에 조선시대의 그림에 맨드라미가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오천 원 권에 보면 뒷면에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가 그려져 있는데, 거기에 보면 수박과 맨드라미가 보이지요. 맨드라미를 그려 넣은 이유는 ‘계관화’라는 이름에 기인합니다. 닭의 벼슬이 입신양명의 상징이었던 까닭에 출세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맨드라미를 그렸던 것이지요.
한편 ‘맨드라미’라는 이름이 외래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실은 순우리말입니다. 맨드라미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유명한 설 두 가지만 소개합니다. 하나는 닭벼슬을 뜻하는 강원도 방언이 ‘면두’인데 이것이 ‘면두리’로 또 ‘맨들’로 그리고 지금의 ‘맨드라미’로 변화했다는 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불교와 관련한 설인데요, 고려 때 불가에서는 맨드라미를 만다라화(曼陀羅花)라 하여 하늘의 꽃이라 부르기도 한 모양입니다. 이것이 민간으로 전해져 맨드라미로 변했다는 설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규보의 시를 또 소개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世言此是曼多羅(세언차시만다라) / 所以喜栽僧院地(소이희재승원지) / 此說荒唐亦莫憑(차설황당역막빙).” 우리말로 풀면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것이 곧 만다라라 / 이 때문에 절에다 심기를 좋아한다지만 / 황당무계한 이 말 또한 믿을 수 없네” 정도 되겠지요. 아무튼 이규보는 맨드라미를 만다라라고 하는 당시의 속설을 부인하고 있지요.
옛날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이은봉 시인의 「빨래하는 맨드라미」라는 시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담벼락 밑 수돗가에 앉아
맨드라미, 옷가지 빨고 있다 지난 여름
태풍 매미에 허리 꺾인 어머니,
반쯤 구부러진 몸으로
여우비 맞고 있다 도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집 장남,
그러려니 떠받들고 살아온
맨드라미, 텃밭이라도 매는 듯한 자세로
시든 살갗, 쪼그리든 젖가슴,
얼굴 가득 검버섯 피워 올리고 있다
톡톡 터져 오르는 큰자식의 마음,
비누질해 빨고 있다 어머니
가는 팔뚝, 깡마른 종아리,
비 젖어 후줄근해진 몸으로
이 집 장남 지저분한 아랫도리,
땅땅, 방망이 두드려 빨고 있다.
― 이은봉, 「빨래하는 맨드라미」 전문

이은봉 시인은 맨드라미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지요. “반쯤 구부러진 몸” “시든 살갗, 쪼그리든 젖가슴” “얼굴 가득 검버섯” “가는 팔뚝, 깡마른 종아리” “비 젖어 후줄근해진 몸”이라 표현하면서 어머니를 맨드라미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맨드라미를 그려내고 있는 시를 한 편 보겠습니다. 이승희 시인의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라는 시입니다.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 이승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전문

한여름 작렬하는 뜨거운 태양 속에서 붉디붉은 맨드라미가 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과거의 어느 한때를 떠올리는 것이지요. 붉디붉었던 화양연화의 시절을 말입니다. 맨드라미가 닭의 벼슬을 닮았다고 하지만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스페인의 무희가 열정적으로 플라멩코를 추는 듯하고, 프랑스의 무희가 치맛단을 잡고 캉캉춤을 추는 듯하고 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하지요. 시인 또한 맨드라미에서 그런 모습을 본 듯합니다. 그러고는 붉디붉게 타올랐던 한때를 회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꽃 피는 시절을 지나온 사람이면 그 꽃 피는 시절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그런 추억과 그리움보다는 이제는 어떻게 꽃 지는 시절을 덤덤하게 받아드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꽃 피웠던 시절은 시절대로 아름다웠듯이 꽃 지는 시절 제대로 지면서 일생을 마무리한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일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