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살롱

요즘은 통 극장에 가지 못한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까닭인데 덕분에 집에서 영화를 받아보는 게 어느덧 습관이 되었다. 영화를 받아보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온라인 시사회다. 코로나 전만 해도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에 직접 찾아가 영화를 보았고 동료 평론가들과 만나 차를 나누기도 했으며 덤으로 미루어두었던 다른 개봉작 감상을 하곤 했다. 이제 다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넋두리로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The Rest of Us, 아이스링 친-이 감독, 극영화, 캐나다, 2019년, 80분)이라는 영화가 어쩌면 내 처지를 반영하는 것 같아서다.
남편 크레이그에게 딴 여자가 생겨 이혼을 당한 캐미(헤더 그레이엄)는 딸 에스터(소피 넬리스)와 살고 있다. 딸은 자신을 버린 아빠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갖고 있으며 이 적대감을 엄마에게 유감없이 폭발시킨다. 영화 첫 장면에서 아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저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춘기 소녀가 부모에게 드러내는 예측불가의 반항심 정도로 여겼다. “이모티콘으로 도배하지 말고 정상적인 대화를 해”(엄마의 잔소리) “흥”(에스터의 콧방귀), “아침부터 디저트를 먹어?”(과자에 마요네스 덧칠해 먹은 딸에게), “엄마가 사왔잖아!”(당치도 않은 딸의 변명). 그래서 둘 사이의 대화를 오히려 다소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완전히 헛다리짚은 꼴이었다.
이 영화에는 캐미와 에스터 외에 레이첼(조디 발포어)와 13살 털룰라(애비게일 프니오브스키)도 등장한다. 이들은 재혼한 크레이그의 부인과 딸인데 그가 갑자기 빚만 잔뜩 남겨놓은 채 심장마비로 죽었고, 급기야 살던 집에서조차 무일푼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크레이그가 위자료 조로 마련해준 캐미의 집에 네 여성이 같이 사는 수밖에 없다. 영화가 슬슬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이별 뒤에 알게 되는 것들」의 장점은 솔직함에 있다. 상황도 솔직하고 대화도 솔직한 덕분에 비밀이 언제 밝혀질지 몰라 아슬아슬해 할 필요가 없다. 이혼한 남편의 새 아내면 어떻고, 배다른 동생이면 어떤가? 이들이 모여 새로운 개념의 가족을 만드는데 장애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처럼 결말이 행복해지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셈이니 관객은 그저 과정을 재미있게 바라보면 그뿐이다.
과거에 비교할 때 요즘은 부부관계나 부모 자식관계에도 파격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이를 선도하는 것은 아무래도 서구사회일 텐데 그 중에서도 미국은 또 한발 앞서나가는 것 같다. 이를테면, 얹혀사는 장성한 아들의 퇴거명령을 받기 위해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고 초등학생 자녀가 별 것도 아닌 부모의 간섭을 경찰에 알려 보호신청을 받은 사례도 다 미국에서 흘러나왔다. 따라서 아내가 경제적 상황뿐 아니라 사랑마저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던 일방통행 식 관계도 당연히 과거의 것으로 묻어버려야 한다. 남자라는 존재 없이도 여자들이 얼마든지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속한 세계도 이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영화는 우리시대의 거울이란 점이 분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