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나의 조상(祖上)이란 주제를 놓고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러니까 아득히 수백만 년 전 아직 북쪽대륙이 온난(溫暖)한 지대(地帶)였을 때 거기서부터 한반도로 흘러내려온 낭만적인 우리 조상 종족들의 이야긴가, 아니면 성씨대관(姓氏大觀)에 기록(記錄)되는 한양조씨(漢陽趙
氏)의 명인명현(名人明賢)을 추적하는 그런 이야긴가 하는 것에.
그러나 어느 것에든 이런 것은 지금 나의 능력의 한계를 넘은 것이기 때문에 여기선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로서 그 모든 조상을 대신할까 한다.
할아버지 이름은 성섭((成燮) 호는 도여(都汝)와 일래(一來) 두 개였다. 아버지 말씀에 일래(一來)란 할아버지가 자기가 이 세상을 한 번 오셨다고 해서 그렇게 부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느 한때 나는 그 호와 연관지어 아버지가 두 번째 그리고 내가 세 번째니까 삼래(三來)라는 호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볼 때도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아주 어려서 할아버지와 같이 목욕탕으로 간 일이다. 뜨거운 탕이었는데 그는 무서워하는 나를 꼭 껴안고 그 물속에 들어갔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아주 장성할 때까지 뜨거운 목욕탕 속으로 들어가면 마치 누구의 품속에 안긴 것 같은 그런 아늑한 기분이 되던 것도 기억한다. 또 하나, 할아버지는 자기의 병(病)과 어떤 상관이 있으셨던 모양으로 이쁜 표주박을 나의 고추에 대고 오줌을 누게 하셨던 일이다. 그것을 잡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환갑 때 춤추시던 모습. 그는 키가 크셨다. 나는 키가 작지만 동생의 큰 키를 보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뿐 할아버지와 나는 늘 멀리에 떨어져 살았으나 나는 그를 자주 생각했었다.
할아버지는 함남정평구읍(咸南定平舊邑)에 그리고 우리 집은 함북회령
(咸北會寧)에 있었으니까.
왜 그러셨던지 장손(長孫)이셨던 아버지는 삼촌들에게 농토와 산을 맡기고 외지에서 사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여셨던가? 존상(存相)이란 글 잘하는 할아버지 이야기도 문집의 이야기도 어려서 몇 번 들었고 족보에서 그 할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국토가 분단된 후 내가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오는 20대 초반, 그런 족보를 챙길 처지도 아니었고 이렇게 오래 갈라 살 줄 예상도 못했기 때문에 현재 내가 대체 누구의 몇째이며 몇 대(代)인지 자식들에게 이것을 일러주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젊어서는 죽음이나 고향이나 하는 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까마득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살기가 바쁘고 세상의 영예와 스스로의 기대와 약속의 노예(奴隸)였기 때문에 였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회 속의 나의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죽음이나 고향이 가깝고 따스한 이웃처럼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것과 내가 아주 단단한 끈(紐)으로 연결돼 있고 그 보이지 않던 끈이 뚜렷이 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것은 큰 바다에 사는 숭어가 마침내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찾아와 죽고 호랑이도 죽을 때는 고향을 생각한다는 그것과 꼭 맞는 심성이어서 나는 이것에 야릇한 향수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아버지는 어느 할아버지가 쓰신 글 「紫陽家訓(자양가훈)」이라는 큰 병풍을 집에 모시듯 간직하고 계셨다. 그 속에 내용을 몇 번이고 설명해주셨는데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가난한 것은 자랑일 수 없으나 부끄러움이 아니다’는 이야기뿐이다….
이제는 모두들 잃더라도 이 병풍만은 찾고 싶은 생각인데 북쪽에 남아있는 나의 누이동생이 그것을 그대로 지켜주고 있을지 그것만을 믿고 있다.
나는 길가에서 만나는 친구의 아들딸에게서 놀랍게도 닮은 그 아버지의 얼굴을 찾을 때가 있다. 아무리 긴 세월을 살고 교배(交配)되고 하였어도 조상과 이어지는 뜨거운 피의 끈인 것이다.
지금의 나도 마침내는 내가 아니고 어느 나의 할아버지일 것이라고 깨닫는다. 그가 주신 호흡(呼吸) 맥박(脈搏) 영혼의 모습― 다행스럽고 또 의무감을 느낀다.
이 세상을 몇백 몇천 번 다시 오고 죽고 하여도 그것은 조상의 보살핌일 그 와의 운명적인 연결 때문이지 내 자신만의 요행이 아님을 깨닫는다.
조용히 생각하면 먼먼 아득히 먼 그 옛날 털을 뒤집어 쓴 내가 홀연히 나무에서 내려와 숲을 버리고 호기심으로 이 땅 위로 걸어 나오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법륜(法輪) 1985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