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해방 전 이른바 日本軍(일본군) 技術將校(기술장교)라는 것으로 南方(남방)에 파병되었다가 종전 후 일본에 귀화해버린 고향의 선배를 30여 년 만에 서울서 만났다.
10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일본 사람이 된 그 형은 그곳에서 일본인 부인 사이에 아들 딸 여럿을 두고 큰 건축회사의 중역이 되어 잘 지내고 있다는 소문도 간간이 듣던 터이다.
물론 그 세월 동안 한국의 그 친구나 동창들 중 長次官(장차관)이 된 사람도 있고, 교수도 또는 돈을 많이 번 부자도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가 서울에 한 번 다녀간 후로는 매해 겨울 서울로 와서 며칠씩을 묵고 가는 버릇이 생겼다. 曰(왈) “서울은 고향처럼 포근하고 편안하다”는 것이 그 이유.
내가 그 형을 호텔로 찾았을 때마다 그는 약간 술에 취해 있었고, 연방 술잔을 들고 있는 그런 상태였다. 차라리 그런 모습이 늙은 나이에 조국을 찾아온 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더구나 내가 보통학교시절일 때 형은 중학생이었고 내가 중학생일 때 형은 경성고등공업학교 학생이어서 형에 대한 나의 생각이 그렇게 돼 있었던지도 모를 일이다.
형이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오면 영화얘기며 음악얘기를 자랑스럽게 들려주던 일이 기억난다.
어떻든 이상한 것은 내가 형을 서울서 처음 만났을 때, 다카미네 미에코
(高峰美枝子)라는 일본의 미인배우를 불현듯 떠올렸던 사실이다. 그것은 형이 다카미네 미에코를 자기 나이보다 두 살 아래… 라고 하던 그 충격적인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다카미네 미에코는 「荒城(황성)의 달」이라는 영화의 주인공 소녀로 출연하여 그 청초하고 맑은 모습이 그때의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배우였다.
현재 그의 나이가 형보다 두 살 아래라면 나보다 세 살 年上(연상)이란 계산이 된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 배우는 「湖畔(호반)의 宿(숙)」이란 노래를 유행시켰는데 나는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짝사랑의 감상에 사로잡혔던 것을 기억한다. 필경 그때 형도 그 여인을 좋아했을 텐데, 내가 감히 미치지 못하는 나이로 형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움 같은, 그리고 철없는 식민지 소년의 꿈의 허망함을 생각한다.

서울경제신문 1991년 1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