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8일 인쇄
2017년 1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7년 11월호 통권 501호 |2018년 5월 21일 월요일|
 

공연평

 

소극장에서 찾는 춤의 확장 가능성
- 전동일·신현지




정기헌(鄭基憲)(춤평론)

* 전동일 안무 『밝은 것은 없다』(10월30일 성균소극장)
어둠을 찢으며 들려오는 고안나의 태평소 소리. 커다란 울림은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작은 소극장을 넓은 미지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거친 음색은 메마르고 숨 가쁜 퍽퍽한 도시의 모습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원색의 음들이 규칙을 가지고 들려온다. 마치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이 본성에 꿈틀거리는 찢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 듯하다. 이어서 소리의 여운이 남은 공간에 권지혜가 사물악기 쇠를 들고 나와 투박한 장단과 발놀음을 놓는다. 뭔가 어긋난 또는 삐뚠 춤과 움직임. 머리에 커다란 꽃술을 단 상모를 쓰고 조근조근 발을 디딜 때마다 사람이 제대로 걷는 것과 어긋나게 걷는 것, 바른 말과 어긋난 말, 좋은 것과 피하고 싶은 것, 밝음과 어둠이 교차해서 떠오른다. 누구에겐 바르고 또 누구에겐 어긋난 것일 수 있으니 이 세상에 똑 부러진 규정은 불가능해 보인다. 좁은 소극장 무대에서 전면으로 사뿐 다가오지만 엇박자의 쇳소리는 멀리로 흐르고 있다.
마지막은 전동일의 장구춤. 물이 묻은 붓으로 무대 바닥과 벽에 커다란 선을 만들고 장구를 든다. 허리에 끈을 바싹 조여매고는 하늘을 향해 높게 쳐든 팔을 가르며 장구춤이 시작된다. 채와 궁이 만드는 울림의 소리가 커다랗고 무겁다. 때문에 내딛는 춤의 발걸음 하나가 쉬운 것이 없다. 굿거리와 자진모리에 더해 형식이 없는 무박의 연주. 이 소리를 만들기 위한 몸짓이 그대로 춤으로 보여 진다. 감성놀음으로 예쁘고 시시했던 장구춤과는 본질이 다른 신명을 담은 소리이고 춤이라 해야겠다. 소리를 춤으로 그리는 것이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울림을 만들어 내기에 그 인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아주 밝은 빛에는 숨은 어둠이 보이지 않듯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밝음이 있음을 춤으로 펼치고 있다.
세 사람의 아티스트가 춤과 연주를 주고받는 협력 공연. 마지막은 마당놀음의 꾼들답게 객석의 관객을 무대로 불러내어 함께 노는 춤판으로 마무리 한다. 춤을 위한 작은 공간 성균소극장에서 오랜만에 작품을 보았다. 좁은 계단을 돌아 내려간 극장에 이십여 명이 좁은 의자에 앉아 작품을 기다리는 것에 신선한 설렘이 있었다. 춤을 출 수 있는 소극장을 찾기 힘든 요즘 아주 가까이 관객과 대면하는 커다란 춤을 만났다.

* 신현지 안무 『휴먼』(10월28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어둠 속에서 빛을 등지고 한 여인이 다가온다. 무대에는 오브제처럼 놓인 웅크린 나신들. 이어지는 무용수의 솔로와 듀엣. 계속되는 군무까지 섬세한 움직임과 춤의 흐름은 군더더기 없이 부드럽다.
리플릿을 통해 안무자는 넘쳐나는 정보와 사물들 속에 인간의 본성이 상실되고 있다고 주지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본성이란 것은 ‘몸’에서부터 관찰될 수 있다고 주목한다. 온전히 리플릿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이 내용은 메시지가 꽤 무거운 것이었다. 작품 전체에 이어지는 몸과 움직임은 조심스럽고 절제된 수준 이상의 흐름을 가지고 있지만 메시지를 풀어가는 설득력은 갖추지 못했다. 인간성 상실, 본성의 회복, 몸의 발견. 이런 이슈를 다루는 것은 안무자가 정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시지는 작품 감상의 전면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설득과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메시지가 아주 치밀하게 구성되거나 아니면 느낌이란 것을 가지고 구현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안무라고 부른다. 또는 안무자의 역량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창의의 독특함이 아니어도 자신의 것, 자기 춤이란 것이 무엇인지 안무자는 보여야 한다. 창작발레의 빈곤한 작품력에서 특히 생각할 부분이다. 자신의 춤, 자신의 무엇을 하나 분명하게 만드는 돌파구는 선명하게 내거는 메시지에 있음을 생각해 본다. 설득력 없이 공허하다면 어떤 제목, 어떤 주제에 놓아도 비스듬히 들어맞는다. 이것은 작품을 구성해보기 시작한 학생들의 몫이지 프로의 것이 아니다. 몸의 아름다움에 비해 메시지의 빈약하고 초라한 대비가 이렇게 클 수도 있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