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8일 인쇄
2017년 1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7년 11월호 통권 501호 |2018년 2월 21일 수요일|
 

논단

 

존재론적 미적체험으로서의 춤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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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창(鄭喜昌)
(한국춤평론가회원·변호사)

1. 서론 - 예술의 본질
삶과 관련하여 모든 생각들이 항상 가 닿는 곳은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 모든 대상, 모든 현상에서 그 본질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삶 자체와 삶과 관련된 모든 현상들을 궤뚫어 보는 것이다.
예술이란 삶의 중요한 한 표현이요, 한 방식이요, 한 현상이요,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본질은 무엇에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 예술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항상 되돌아 생각해볼 수밖에 없는 주제가 된다.
철학 가운데 미학이란 분야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종종 예술적인 아름다움으로 귀결되고, 예술이란 것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극단의 양식 혹은 행동방식이 되기에, 미학은 많은 경우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학문이 된다.
예술의 여러 형식 가운데 무용예술은 우리의 몸 전체를 사용하여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느낀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다. 무용은 문학, 음악, 미술 등 다른 예술의 분야와 같은 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일까. 다른 장르의 예술과 달리 무용에서만 독특한 미, 아름다움이 있는 것일까.
이하에서 다시 한 번 무용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하여 탐구하여 보고자 한다.

2. 여러 예술 장르의 신체의 움직임 측면에서 본 특성
우리의 모든 활동은 우리의 몸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다. 단순한 사색일 경우라도 우리는 걷고 있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몸을 누이고 그러한 활동에 빠진다. 때로는 사색이 우리의 특정한 신체적 행동을 유발하기도 하고 혹은 괴테가 혹은 베토벤이 그러하였다고 하듯이 산책이라든가 하는 특정한 행동이 그러한 사색을 자아내거나 돕기도 한다.
문학에 있어서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글쓰기로부터 시작한다. 책상에 앉거나 혹은 엎드려서 종이를 앞에 두고 필기구를 가지고 이미 우리의 사고 체계 내에 존재하는 특정한 언어 혹은 언어들을 사용하여 그 언어들을 조직하여 종이에 차례로 늘어 놓는 작업이 글쓰기 작업이다.
이러한 글쓰기 작업은 최근 데스크탑 컴퓨터, 랩탑 컴퓨터, 노트북 컴퓨터에서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업으로 변경되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터치를 인식하는 화면을 가진 태블릿이나 휴대폰 등에서 화면에 나타나는 키보드를 건드리는 작업으로 변경되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사고와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알린다. 문학에는 이러한 작가의 행위와 작가의 행위로 태어난 언어의 조합물인 문학작품이 존재한다. 다만 문학작품은 그것의 본질이 언어의 조합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낱장의 종이로 존재하든 묶어진 책으로 존재하든, 혹은 컴퓨터 파일로 디지털화되어 모니터 앞에 펼쳐지든, 혹은 아예 형태를 달리하여 누군가에 의하여 낭독되어 소리로 존재하든 같은 문학작품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문학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이들은 비록 종이의 질감에 주목하거나 혹은 책의 표지그림이나 삽화 또는 책의 장정에 주목하거나 혹은 모니터에 나타나는 폰트에 주목하거나 혹은 낭독하는 이의 성조나 음률 또는 능숙함에 주목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감상하고 향유하는 근본적인 것은 작가가 조합하여 놓은 언어 속에서 드러나는 줄거리나 사상이나 혹은 감정들이다.
문학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이들은 작가가 그 글을 쓸 때의 자세나 행동양식 같은 것은 거의 관심에 두지 아니한다.
음악이 감상과 향유에 제공되기 위하여는 작곡과 연주의 두 가지 형태의 작업이 있어야 한다. 작곡의 자세나 행동방식은 주로 글을 쓰는 작업과 비슷하다. 예전에는 펜으로 오선지에 음표와 쉼표 등의 기보를 하는 것이었다면, 현재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업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기보 프로그램과 작곡 프로그램과 나아가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악보를 그려나갈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이 있다.
그러나 작곡가의 작업물은 언제나 악보 혹은 그것과 함께 작곡가가 만든 최초의 음원으로 귀결된다. 악보의 연주 혹은 작곡가의 음원을 발전시키거나 변형하거나 응용하는 것은 연주자의 몫이다.
연주자의 행동은 그것이 연주되는 장소가 녹음실이든 혹은 무대이든 주로 악기의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 피아노는 대개의 경우 건반 앞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과 발을 사용하되 표정이나 머리나 몸을 사용하여 움직임을 확대하고 과장한다. 바이올린은 앉거나 서서 턱으로 악기를 고정하고 한 손은 현 위를 짚으면서 다른 한 손은 활로 현을 마찰한다. 클라리넷은 입술로 한 쪽은 넓게 펼쳐진 긴 막대의 반대쪽 좁은 한 끝을 물고서 양 손을 사용하여 막대에 난 구멍들을 조심스럽게 골라가면서 짚으면서 입술 주위와 볼의 근육을 움직이며 막대 속으로 바람을 불어넣는다. 북을 두드리는 채를 들고 연주하는 팀파니와 같은 타악기는 움직이는 순간 최소한 상체의 움직임에 있어서는 다른 악기들에 비하여 단순하면서도 더 극적인 동작을 보여준다.
그러나 음악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이들은 작곡가의 행동이나 연주자의 행동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과 음향과 음조의 조합에 주목한다.
미술에는 화가나 조각가들이 사용하는 소재와 질료와 만들어내는 형상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행동양식들이 존재한다. 화폭이나 캔버스를 앞에 두는 화가들은 기본적으로 앉거나 서서 물감을 찍거나 묻히거나 퍼서 바르는 행동을 할 수 밖에 할 수 없다. 돌을 깎는 조각가들은 정이나 망치나 끌이나 혹은 전동 그라인더 등을 사용하여 만드는 작품의 사방을 돌아가면서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 보고 손으로 쳐내고 손으로 문지르고 마찰하여 밀고 당기는 행동들을 한다. 흙으로 빚는 조소가들은 고정된 혹은 빙빙 도는 작업대를 두고서 섞고 반죽하고 붙이고 뜯어내고 반들하게 문지르고 꾹꾹 눌러가며 홈을 내고 가느다랗게 파내는 등의 행동들을 한다.
미술가는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형상을 그들의 손으로 여러 가지 세상의 도구와 재료들을 사용하여 사물로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물은 그들의 머릿속에 있던 형상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목적하는 것은 머릿속의 형상을 그대로 사물로 구체화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구체화되어 나타난 사물이 하나의 통일감을 가지고서 독립적이면서도 유일한 것으로서 다른 것들과 구별되게 남는 것이다.
미술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이들은 행위예술로 규정지어지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미술가들의 행동양식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미술작품은 미술가의 손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이라는 예술의 장르와 달리, 무용은 몸짓 그 자체를 예술행위에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자 도구이자 소재이자 표현형태로 삼는다.
무용은 그것이 대극장이나 소극장이나 혹은 노천극장을 불문하고, 심지어 그것이 거리이거나 혹은 안방에서 부모나 친지들을 앞에 둔 마루이거나를 불문하고, 주로 그러한 크고 작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을 무용예술의 작품이라고 부른다.
무용작품의 감상자들은 오직 무용가의 신체 움직임과 동작과 그들의 배치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무용가들의 움직임은 그것이 느린 것이든 빨리 지나가는 것이든 한 순간 지나가버리면 어느 감상자도 그것을 붙잡아 둘 수 없다. 무용가들의 움직임을 무보나 혹은 그림이나 영상으로 묶어 둘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본래의 무용작품이 아니다. 무용작품은 오직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리는 그러한 동작 속에만 있다.
그러하기에 감상자들은 영상을 통하여 과거 어느 순간의 무용가들의 흔적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동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몸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무용작품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의 무용은 본질적으로 감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용예술의 다른 장르의 예술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특히 무용예술에 있어서 무엇이 예술의 본질인가, 어떠한 것을 예술이라고 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3. 예술작품인가 미적체험인가
미학을 논하거나 예술을 논하는 대부분의 논의는, 미란 어디에 있는가, 예술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무엇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회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인가에 대하여,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이 곧 예술이다, 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예술가가 누구이고, 예술작품이 무엇이냐에 대하여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예술가이고, 예술가가 만드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라고 하는 마치 말놀이 같은 순환적인 답이 주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잘 만들어지고 잘 정제되고 그리하여 많은 이들에게 혹은 시간을 지나가면서 계속 혹은 새롭게 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것을 우리가 예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만약 예술작품이 예술이라면 무용예술에 있어서는 과거는 지나가서 사라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아니한 것이며 현재는 한 순간에 지나쳐 가는 것일 뿐이기에 잘 만들어진 것이건 잘못 만들어진 것이건 예술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귀결로 무용예술에 있어서는 예술도 존재하지 않거나 예술의 본질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또한 미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많은 무용가들은 자신이 가장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상당히 좋은 무용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 작품이란 것은 그들의 머리 속에 있거나 혹은 몇 군데 메모로 적혀 있는 동작의 순서와 배치들이 안무되어 있는 그러한 것일까. 혹은 여러 무용수들을 한 곳에 모아서 그 안무대로 연습을 하게 하고 그리고 어느 무대에선가 한 번 펼친 적이 있는 그러한 것을 작품이라고 하는 것일까. 혹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니면 며칠 후에 무대 위에 펼치게 될 그러한 것을 작품이라고 하는 것일까.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은 그 작품들이 고정되고 되풀이하여 감상될 수 있지만 무용작품은 고정될 수도 없고 되풀이하여 감상될 수도 없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무용에 있어서 진정한 예술작품이란 존재하였거나 앞으로 잠깐 존재하게 될 뿐인데,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것을 미의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예술의 본질이 예술작품에 있지 않다면 과연 예술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미의 대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무용예술의 본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예술의 본질 혹은 미의 대상이 예술작품이 아니라 미적체험에 있다고 하여야 한다. 실제로 무용예술만큼 미적체험, 예술적 체험을 하기에 적절한 예술은 없다.
문학에 있어서의 미적체험은 잘 써 놓은 글을 읽거나 듣고 그 사고의 흐름이나 감상의 진폭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글쓰기는 또 다른 차원의 미적체험이 될 수 있으나 글쓰는 행위는 종종 기쁨보다는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며, 무슨 글이든 쓰는 행위 자체가 곧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혹은 어느 공간에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음악에 있어서의 미적체험도 주로 잘 작곡되고 잘 연주된 것을 즐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직접 자신이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연주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역시 다른 차원의 미적체험을 가져다 주는 것이지만, 대부분은 한 악기로 소리를 제대로 내기조차 쉽지 않고, 나아가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연주를 하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다.
미술은 선을 긋고 색을 칠하고 흙을 빚고 돌을 깎고 하는 어느 것이든 원체가 따분한 반복작업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미술작업에서는 완성된 사실에 기쁨을 맛보는 것 이상의 미적체험을 하기란 역시 좀처럼 쉽지 않다. 잘 만들어진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는 미적체험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며, 미술가가 되기로 작정하지 아니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어린 시절 한 때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미술시간의 미적체험 이상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무용은 무용가들조차 춤을 추는 순간 자신의 몸이 하는 그 동작들에서 미적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몸을 움직이는 것에서 오는 미적체험이 바로 무용예술의 본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곧 어느 다른 예술의 장르보다도 무용이란 본질적으로 존재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무용에서도 무대예술을 감상함으로써 오는 미적체험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무대예술에 있어서 누가 객석에 우두커니 앉아서 그러한 무대예술을 보는 것으로 얻게 되는 미적체험이 영화를 보거나 영상을 보거나 혹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앞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미적체험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무용예술에서도 당연히 감상의 미가 있겠지만, 최소한 무용예술에서 만큼은 감상의 미에 그 본질이 있지 아니하고 직접 동작을 하는 체험의 미에 그 본질이 있다. 무용예술은 자신이 몸을 움직이며 동작을 행할 때 얻게 되는 때로 고통스러우나 동시에 기쁨을 동반하는 미적인 체험이며, 이는 곧 우리가 살아 있음에서 오는 체험인 것으로, 이러한 체험에 무용예술의 본질, 무용에서의 미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무용예술의 본질이 무대에 올려지는 무용작품에 있지 아니하고 직접 무용을 행함으로써 오는 미적체험에 있다는 존재론적 인식은 현실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 다른 방향의 효과를 낳을 수 있다.

4. 결론 - 무용예술의 본질에 대한 재정의의 효과
삶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할 때, 만약 허무에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허무함을 노래하거나 한탄하며 삶을 보낼 것이다. 만약 향상에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향상하고 다른 이들의 삶을 향상하는 것에 힘을 쏟을 것이다. 곧 본질이 어디에 있다고 파악하느냐에 따라 나아갈 방향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예술의 본질이 예술작품에 있다고 한다면, 개인들이나 사회는 좋은 예술작품을 장려하고 만드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예술의 본질이 예술작품의 감상에 있다고 한다면, 감상법의 교육 같은 것에 힘을 쏟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체험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고 한다면, 많은 예술가들이나 사회는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보다 나은 예술적 체험을 제공하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미적체험이 무용예술의 본질이라고 보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마치 무대예술이 무용예술의 모든 것인 양 하는 관념과 태도를 버리고 무대예술에 두던 중점을 무용예술의 체험에 두도록 해야 한다. 또한 무대에 작품을 올리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하기보다는 진정한 미적체험을 제공하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하여야 한다.
무용가라고 하여 항상 그들이 자신의 무용에서 고도로 정제된 미적체험을 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또한 잘 짜여진 무용작품이라고 하여 그러한 동작들을 수행하였을 때 항상 체험이 미적으로 다가온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의 동작에서 끊임 없이 보다 나은 미적체험을 할 수 있기를 노력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무용가라고 해야 할 것이며, 자신의 작품을 실행하는 보다 많은 이들이 높은 차원의 미적체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이 진정한 무용작품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몸이란 모두 다르고 천차만별이라서, 같은 형태와 같은 기능을 가진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 그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미를 표현할 수 있고 각자 고유의 미적체험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의 표현된 미를 개선하여 나가고 그들의 미적체험을 고양시켜 나갈 수 있다. 무용예술이란 존재하는 생명을 위한 예술이며 그런 존재가 예술적인 동작을 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미적체험에 그 본질이 있다.
무용예술에서 무대작품이 그 본질이 아니라고 하여도 무대작품은 그러한 미적체험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에서 보다 더 깊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무용가의 종종 개인적이면서 사상이나 감정을 전달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무대작품이나 흔하고 일상적인 일련의 동작으로 이루어지는 무대작품 혹은 그림처럼 예쁘기만 한 무대작품이 아니라 모방이나 연상이나 혹은 응용을 통하여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미적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무대작품이 더 본질에 충실한 것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무용인에 대한 평가나 수상 같은 것들에 있어서도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보다 우수한 미적체험이 제공될 수 있도록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선과 관심과 호의와 배려가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무용예술은 이 순간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하는 예술이며, 그 본질은 춤을 추는 것에서 오는 미적 체험, 예술적 체험, 곧 그 행복감에 있다. 그러므로 무용인들이 나아가야 할 바는 이러한 미적체험, 행복감을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으로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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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본 원고는 10월25일 예술가의집에서 개최된 「2017 한국춤평론가회 정기세미나」에서 발제된 것을 전재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