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8일 인쇄
2017년 1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7년 11월호 통권 501호 |2018년 8월 19일 일요일|
 

춤 스크랩북

 

창작의 즐거움까지 맛보는 봉투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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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화(趙東華)
(月刊 춤 발행인)

우편으로 오는 큰 봉투들은 아까워서 도저히 그대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중 종이가 좋고 이쁜 것은 뒤집어 재단하여 새 봉투를 만들어 썼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크고 작은 봉투들 외에도 포장지나 광고 종이까지 쓸 만한 것이면 모두 주워서 봉투로 재생하여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까지 20년 가까이 된다. 이런 짓은 내가 살아온 가난한 세상에서 익혀진 몸에 밴 습관 때문으로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나보다도 우리 어머니의 경우는 더하셨다. 제대로 집을 장만하고 별로 불편한 것 없이 사셨으면서도 옛날의 ‘가난’ 의식을 그대로 지니고 사셨다.

예컨대 서울 살림에는 사실 무청이나 배춧잎으로 만든 우거짓국은 한 달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것인데 어머니는 김장때 마다 생기는 그 많은 우거지들을 버리지 않고 벽돌담 위에 보기 흉하게 쭉 걸어 말리시곤 하셨다. 결국 이것들은 담 위에 그대로 놓여진 채 일 년 내내 눈비를 맞아 썩고 말라비틀어져 거추장스러운 쓰레기가 되었고 매번 그것 때문에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곤 했었다. 그러나 다음해 김장때면 어머니는 다시 또 이 일을 반복하시곤 하셨다. 어머니로서는 먹을 수 있는 것인데 아까워서 도저히 버릴 수 없었던 것임을 내가 몰랐던 것은 아니나 ‘가난’ 이란 것의 자격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방 옷장과 옷장틈새, 옷장 밑은 말할 것도 없이 선물 포장지며 노끈이며 과장상자, 이쁜 깡통까지를 모두 모아 두셨다. 우리집 헛간(창고) 속에도 마찬가지였다. 아까워서 버릴 수 없는 - 온갖 그릇, 깡통, 빈병, 신방들로 그 속은 꽉 차 있어서 정작 들어가야 할 물건은 밖에서 비를 맞는 것이 일수였다.

동아일보 김상만(一民 金相万) 사장은 상여금 이외에 간부들에게는 따로 금일봉(金一封)을 주셨는데 그때마다 그가 건네주는 봉투는 자기한테로 온 편지의 헌 봉투였다. 말하자면 펜으로 봉투의 자기 이름을 쭉 그어 버리고는 그 옆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그런 식의 봉투였다. 큰 신문사의 사장님이고 돈이 많은 분이데도 그런 식으로 헌 봉투를 재사용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존경스러웠던 일이 생각난다.
물자가 흔한 세상에 뒤돌아 앉아 하필이면 헌 봉투를 뒤집을 때마다 가끔 그분을 떠올리며 나는 이런 짓이 꼭 인색하거나 거지 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국판(菊版)의 엷은 나의 잡지책에 맞게 양철로 본(型)을 만들어 뒤집은 봉투를 여기에 맞게 재단하기 때문에 새로 만든 봉투 모두가 한결같아 이것이 쌓이면 여간 충족감 성취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처음 이 작업을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했었다. 우선 궁색하게 보이는 것도 싫었고, 고급한 인력이 겨우 이런 것에 매달려 있다는 자칫 어리석은 모습으로 비쳐질 게 싫어서였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별로 변함이 없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그런 류의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까움’ 때문에 이 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우거지를 말리고, 헌 신을 버리시지 못하는 그런 심정, 우리집 애들이나 잡지사 직원들은 내가 봉투 한 장 재생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그 한 장의 값이 터무니없이 맞지 않는데 왜 그 고생 사서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연민스런 눈빛으로 본다는 것도 알지만 이런 것 모두가 나로 하여금 아까움에서 손 떼게 하지 못했다. 아까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변명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일이 싫지 않다는 사실이다. 싫지 않다기보다 오히려 이 단순한 일이 재미있고 즐겁다는 데 있다.
요즘은 이 일을 잡고 있으면 세상만사 모두 잊는다. 좀 과장하여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가 된다. 반복되는 쉬운 일이란 사람을 이렇게도 만드는 모양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는 틈만 나시면 조각보를 묻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조각천을 이어서 보자기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을 「조각보를 묻는다」 고 말했다.
천 한 조각 한 조각을 잔바느질로 모양있게 묻는 일은 여간 공이 들고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렇게 만든 보자기를 이웃이나 친척에게 아낌없이 줘버리시곤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보자기를 만든다는 경제적인 의미보다 그 행위에 매료되어 즐거이 하셨던 것이 확실한 듯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그 일을 하시지 않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세월이 좋아져 옷감이 싸지고 흔해지니까 자연히 천조각에 대한 아까움이 스러져 버린 탓이리라. 그리하여 그 아까움을 통해야만 얻어지는 성취감과 즐거움도 사그라들었을 테고.

친구들이 종종 나에게 헌 봉투를 모아 가져올 때가 있다. 이상한 것은 그것이 너무 많으면 갑자기 일할 의욕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많으면 아까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일까. 필경 나는 한두 장 날아드는 우편이였기 때문에 그냥 버려지는 봉투들에 아쉬움이 있었고, 그래서 재생에 손을 댔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하루 수십 통, 수백 통의 우편을 받는 그런 회사를 경영했었다면 이런 뜻하지 않은 ‘가난의 미학’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은 크고 완전한 봉투를 뒤집는 것보다 오히려 작고 찢어지고 흠있는 봉투를, 잇고 땜질하고 같은 질의 종이를 찾아 붙이고 하여 외인부대 복장처럼 만드는 일에 더 흥미를 붙이고 있다. 단순히 헌 봉투를 재생하는 데서 더 나아가 창작의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질 때의 성취감은 감히 조각보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미루어 그와 비슷한 것일 수 있지 않겠나 싶다.

- 삼성그룹 사외보 <함께사는 사회> 1995.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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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 스크랩북을 새로 시작한다. 조동화 선생이 1950년대부터 신문 잡지 등에 연재하셨던 춤 평론과, 꽃 이야기, 캐리커처와 인물평, 에세이 등은 수천 편에 이르며 대부분 스크랩 하셨다. 특히 1976년 춤지가 창간되어 평론가가 배출되고 춤의 기록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1953년부터 1981년까지 스크랩 되어있는 천여 편의 유일한 춤 기록들은 우리 문화예술계의 소중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50년도 더 된 이 신문 스크랩들이 더 부스러져 사라지기 전 디지털 아카이빙 작업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잉크가 바래 잘못 읽었거나, 없어진 글자는 ‘?’로 남겨두니 양해바란다. 「스크랩 북」 제1권(1953年11月부터 1956年9月까지) 중 조동화 선생의 첫 번째 춤 평론 ‘균형의 상실 - 송범 무용공연을 보고’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