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7일 인쇄
2018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1월호 통권 503호 |2018년 7월 17일 화요일|
 

관무기

 

문학의 수용과 해체 그리고 동시대 무용철학의 정립
- 김주빈·장혜림




김호연(金瑚然)()

* 김주빈 안무의 『착한 사람』(12월14~15일, 에스에이시SAC아트홀)
치기(稚氣)라는 단어가 있다. 행동이나 생각이 어리고 유치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을 내뱉은 주체는 누구일까? 대개 젊은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 그들보다 어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이는 어른들의 기준에서 젊은이들의 행동이 눈에 차지 않고 성글어 보이기 때문이다.
김주빈 안무 『착한 사람』(12월14~15일, 싹SAC아트홀)은 치기어린 작품이다. 그 또래의 담론을 몸짓으로 푼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연극적 요소의 도입과 지금 이 순간 여기 관객과 함께 고민하고 그들과 무언가 소통하면서도 세련되지 않은 모습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들의 모습은 그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할 뿐 존재에 대한 고민과 행동을 그대로 반영하기에 흥미롭다.
이 작품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Der gute Mensch von Sezuan)」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온다. 그래서 제목도 선인(善人),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천의 선인」의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물질만능의 사회구조 속에서 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명제를 수용하여 이 질문의 해답을 찾는 것이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다. 원래 『사천의 선인』은 착한 사람 셴테가 살아남기 위해 냉혹한 인물 슈이타로 분열되는 역할 중심의 극이다. 이는 착한 사람이며 악한 사람이 공존하는 인간의 이중적 상징성을 그대로 묘파한다. 그렇지만 『착한 사람』에서는 인물 구성이나 심오한 철학보다는 현세에 단순하게 착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며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으로 정답을 풀고 있다. 이는 선악의 대립 양상이 아닌 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사회적 인식에 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공연 처음에는 극장에 들어서는 관객에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9칸에 적게 하고 이를 빙고게임으로 풀어내는 방법으로 실마리를 푼다. 이 과정은 순간적이며 즉흥적이다. 그날 온 관객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고, 빙고를 얻기 위하여 얼마의 시간이 혹은 그것이 재미를 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어설프고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이들에게 있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관객을 ‘착한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주제의식에 동참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관객에게 주제 의식을 함께 고민하고 선험적 기대지평을 열어 이들이 말하는 몸짓이 무엇이며 이 행위가 어떠한 의미를 전달해주는가 쉽게 이해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면서 ‘착한 사람’이 누구인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를 영속적으로 묻고 해결하려 한다. 이는 어떠한 서사구조에 치우치기보다는 감정의 편린에 의존한다. 이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오지도 않는 ‘고도’를 무작정 기다리듯 착한 사람의 존재를 묻고 있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러한 모습을 일상성에서 찾아보려 하고 그 일상에서 여러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자아의 갈등과 함께 사회적 관계성이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이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주변인과 관계적 움직임을 동선으로 하여 이념적인 공간과 현실적인 공간을 하나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자 뺏기와 같은 장면은 그러한 표상이다. 이러한 묘사는 소유, 결국 물질적인 이익을 얻어야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현대인의 상징이다. 또한 ‘착한 사람’이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본인만이 선함을 지향한다고 공공선이 완성될 수 없음을 구체화한다. 작품에서 표현한 따돌림이나 소외 등에서 구현된 면모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안무자의 독무를 통해 착함이 무엇인지 다시 되새김하게 만든다. 이는 관객에게 맺음과 풀림의 장치이면서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로 이 작품이 구조적 기승전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표현에 기초하여 작품을 구성한데 기인한다.
이 작품은 ‘선인 콤플렉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착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진다. 그렇다고 굳이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착하고 말 잘 듣는 것이 좋은 것이란 규범적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이 시대 착하게 사는 방식이 무엇인지의 물음에 귀착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 내내 극단적 갈등 요소는 두드러지지 않다. 이는 이들의 행동이 사회에 저항하기 보다는 순응하며 문제를 그 안에서 해결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의 몸짓은 격정적일 수 있지만 그 또래의 움직임으로 표현되어 ‘앙팡테리블’, 즉 무서운 아이들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짜임새 있는 움직임의 표현은 규칙적이고, 흐르러짐이 없다. 그럼에도 사회가 변화하지 않고, 내가 변화한다고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 2018년 현재 청년들의 자화상 그대로이다.
이는 왜 굳이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갖게 만들고 현시대의 사회상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주제의식이 구체화되지 못하고, 추상성으로 흐른 점도 없지 않다. 몇 가지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던졌다면 이면적 주제의식을 강화하고 관객에게 더한 울림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작품은 무용을 중심에 놓으면서 연극적 요소를 융합하고 있다. 언술이나 구조에 치중하지 않고, 표현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이는 즉각 반응하는 젊은 관객에게는 자연스러운 수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음악도 드럼과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기타로 구성하여 귀를 자극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혹자는 이 작품에 대해 현대춤이나 외국에서 흔히 쓰는 기법적인 측면을 도입하여 신선함이 없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안무자가 한국춤에 기반 하기에 나온 말일 수도 있고, 압도하는 퍼포먼스나 신선함이 부족한 점에서 기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 주제를 추상적 기법이나 난해성이 아닌 진정성을 가지고 관객과 소통하고 고민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이는 이 작품이 어떤 토대에서 만들어졌는가를 떠나 작품의 주제의식의 표현 방식이 어떠하였고, 관객이 어떻게 느꼈는가가 중요하기에 무의미할 듯하다.
안무를 맡은 김주빈은 몸 잘 쓰는 무용수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이번 무대에서는 그가 지향하는 무용의 대중적 지향의지와 함께 치기어리지만 동시대 전형성을 묘파하는 힘도 있음을 확인하여 주었다. 또한 그가 보여주려 하는 방식은 어떤 경계에서 두 가지 이상의 방법론을 용해하여 두드러짐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점일 텐데 첫 무대에서 자신의 색깔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 공연은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 선정작으로 올린 무대이다. 앞으로 일정 기간 착한 무용수로 착한 안무가로 그를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 장혜림 안무 『침묵』(12월22~23일 문화비축기지T4)
‘침묵’은 자의적이며 타의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유명한 명제 ‘말 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여야 한다’처럼 형이상학적인 경우도 있지만 약자에 침묵을 강요하는 부조리한 경우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침묵’만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는 언어 표현도 드물 것이다.
장혜림 안무의 『침묵』은 이러한 두 가지 명제를 함께 함유하며 한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를 묘파한다. 이 작품은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온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수용소로 이송되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숨그네’는 말 그대로 ‘숨’(Atem)과 ‘그네’(Schaukel)의 합성어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한 인간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드러낸다. 『침묵』도 이러한 큰 맥락을 수용하면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진 여러 단편적 의식의 흐름을 정리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과 잠깐 동안 기차를 벗어나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마주한 찰나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이는 1부 ‘열차, 포로들의 춤’, 2부 ‘설원, 자유의 노래’로 나누어 진행된다. 첫 장면은 알 수 없는 언어로 한 인물이 소설의 한 대목씩을 읊조린다. 이어 미지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군의 무리들이 줄지어 가고 외마디 속 몸짓으로 움직임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들은 ‘Yes’의 외침만 있을 뿐 다시 침묵하고, 저항하는 듯 보이지만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동한다. 이들에겐 ‘예스(Yes)’와 ‘침묵’이라는 두 가지 언어표현만 존재하여 이것이 타율적 긍정이지만 어쩔 수 없는 외침이고, 그들의 몸짓은 비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예스’와 ‘침묵’은 아이러니하게 절규에 가깝다. 이는 동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예스라는 순응과 절규의 이중적 경계에서 똑같이 반응하지만 개인에 따라 몸은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고, 집단에서 다른 반응을 보이는 무용수의 변별성을 통해 이기(理氣)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2부에서는 눈이 덮인 벌판에서 자유 아닌 자유를 순간적으로 느낌을 보여준다. 이는 공간의 이동에 따른 억압된 것에 대한 자아의 탈출이며 눈이라는 맑음의 상징 속 긍정의 이미지에 대한 획득이다. 그러면서 삭풍이 부는 벌판이지만 눈을 휘저으며 그들의 외마디와 역동적 몸짓으로 희미한 믿음을 얻고 이들은 미정형의 공간으로 향하게 된다.
여기서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하얀 스티로폼 알갱이로 뒤덮인 설원의 상징적 이미지이다. 이는 시각적이면서도 청각적인 의미를 확보하는데 눈이 가지는 여백 그리고 편안함과 더불어 무용수들의 역동적 걸음과 몸짓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강인한 힘으로 전환된다.
또한 이 작품에서 중요한 매개 중 하나는 소프라노이자 구술자인 엘라 만자시이다. 『침묵』은 「숨그네」의 서사구조를 차용하면서도 현세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공유한다. 2차 세계대전 루마니아인의 소련 수용소의 여정을 기저로 하지만 구술자를 말라위 여인 엘라 만자시가 맡음으로 아프리카가 직면한 현재적 시각을 중첩시킨다. 질병과 가난, 여성할례와 같은 악습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여성의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구현한다. 그는 구원의 목소리로 작품의 중심에 놓인다. 2부에서 설원에서 펼치는 몸짓은 침묵을 깨는 역동적 언어로 상승되는데 이러한 계기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상시키는 그의 목소리에서 비롯된다. 흔히 ‘전쟁은 신도 침묵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그것이 신이 침묵하는 것인지 인간을 시험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기간은 스스로 고뇌하고 회복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 가운데 이 침묵을 깨는 신과 인간을 잇는 매개를 통해 구원을 받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의 목소리이다. 이는 「쇼생크 탈출」의 명장면 중 하나인 듀프레인이 레코드 음반으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틀고 죄수들이 ‘벽들이 무너지고 그 짧은 순간에 쇼생크의 모두는 자유를 느낀’것처럼 이들에게도 치유이며 희망의 목소리로 다가온다.
이미 『침묵』은 2016년 창작산실우수신작공연으로 무대화되었지만 문화비축기지라는 공간에서 새롭게 다듬어져 관객과 만났다. 우선 문화비축기지 T4라는 공간은 넓은 원형으로 되어있는데다가 높이가 있어 공연을 위해서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게다가 무대 중간 중간에 여러 개의 기둥이 있어 무용수들에게는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며, 관객에게는 시야가 제한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한 활용도가 높다. 먼저 음악이 강하지 않고, 소프라노의 목소리와 현악기가 중심에 놓여 공명을 통한 울림의 폭은 깊었다. 또한 움직임도 좌우를 동선으로 하여 훨씬 자유롭게 이 공간을 활용하였고, 이를 관객의 지근거리에서 표현함으로 긴장감과 몰입을 함께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남자 무용수의 등장은 이전 공연과 변별성을 지닌다. 「숨그네」의 주인공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17세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이다. 동성애를 한 17세 소년이 자기 입안의 침묵과 성당에서 마주한 성자의 어린 양의 침묵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이 침묵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지는 주제의식이고, 『침묵』의 기저도 이러한 점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한 인간이 여정을 통한 깨달음은 이 남자 주인공의 등장을 통해 더욱 공고히 되었다.
『침묵』은 한 개인의 통제된 여정을 통한 존재론적 인식의 과정이기에 종교적인 상징성도 강하다. 이는 안무자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자연스럽게 표현된 면모이고, 원작이 가지는 주제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표현은 역설적으로 실존적 의미로 확보한다. ‘내 침묵의 의미는 무엇인지, 신은 왜 침묵하는지’에 대한 실존 의식은 안무자가 의도한 감정표현과 감각묘사 그리고 사상표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는 단편적이며 추상적 표현을 통해 중립적인 가치를 만들고, 또 ‘침묵’이란 주제 의식 속에 형성된 구상적 구조 형성에서 비롯된다.
장혜림은 『숨그네』로 2015년 「크리틱스 초이스」 최우수상을 받았고, 『심연』으로 좋은 평가를 얻은 안무가이며 무용수이다. 그의 작품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곳에 앉아 무거운 저기압을 느끼지만 그 미지의 숲을 함께 걸으며 저 끝 간 곳에는 무언가 희망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긍정적 힘이 존재한다. 그의 진보가 기대된다.

여기서 논한 두 안무가는 우연찮게 한국춤에 기반을 두는 젊은 안무가다. 그렇지만 두 작품에서 ‘한국적’ 혹은 ‘전통적’ 내음은 두드러지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바탕을 전면에 드러내기 보다는 동작의 규칙성이나 표현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작품 속에 녹아 있을 뿐이다. 이는 이들이 생각하는 한국적이란 표현 방식의 인식에서 비롯될 것인데 그래서 이런 논의는 무의미할 수 있다.
또한 두 작품은 문학이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 『착한사람』은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 『침묵』은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가 원천이 되었다. 아무래도 문학을 해석하여 무용으로 작품화한다는 것은 안정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문학이 가지는 이러한 장점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수용자는 선험적 지평이 있고, 이것이 그대로 혹은 잘못 해석된다면 원작을 해쳤다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두 안무가는 원전이 가지는 주제의식을 비판적으로 수용, 해석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좋은 의미를 생성해냈다. 하나의 주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면서 의식을 가지고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또한 우연찮게 독일어로 구현된 작품이고, 철학적 배경이 강한 작품을 배경으로 한다는 공통점도 지니지만 어찌되었건 이에 대한 해석은 안무자의 몫이기에 이 작품을 통해 안무자의 철학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두 안무가의 앞으로 어떠한 작품을 구현할 것인지 기대를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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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김호연: 「한국근대악극연구」로 단국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동경대학 외국인연구원, 광주여대 교양과 조교수, 단국대 무용과 연구 조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한국근대무용사」, 「한국연극의 새로운 인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