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7일 인쇄
2018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1월호 통권 503호 |2018년 7월 17일 화요일|
 

국악살롱

 

여성농악과 여성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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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尹重剛)(국악평론)

‘여성농악’의 시대가 있었다. 1950년대에 ‘여성국극’이 큰 인기를 끌지 않았던가? 이보다 좀 앞선 1947년, 우리나라에서 여성만으로 구성된 여성농악이 공연되었다. 4월1일부터 4일까지 나흘 동안, 창경궁(당시 ‘창경원’)에선 「전국민속예술농악대경연」이 열렸다. 봄맞이 최고의 야외공연으로, 총 4부로 구성되었다. 민요와 판소리, 창극, 줄타기 등이 공연된 이후에, 당시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농악(판굿)이 펼쳐진 거다. 이때 처음으로 여성만으로 구성된 농악이 본격적으로 첫 선을 보였다. 당시 신문에서 ‘여성농악’을 “조선 초유(朝鮮初有)의 순낭자(純娘子) 수십 명으로 편성된 여성농악군(女性農樂軍)”으로 표현하고 있다.(1947. 3. 26. 경향신문)
「전국민속예술농악대경연」은 이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현, 한국민속예술축제)를 개최하게 한 원동력이다. 이런 「전국민속예술농악대경연」에서 하이라이트는 단연 ‘농악’이었다. 농악이 야외공연의 꽃이었다면, ‘여성농악’은 축제에 있어서 ‘꽃 중의 꽃’이었다. 농악을 하는 그녀들을 ‘낭자(娘子)라고 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이 낭자 아닌가? 농악을 하는 그녀들이 그대로 ‘낭자’였다. 봄을 맞아서 마음이 들뜬 상춘객들이 당시 ‘여성농악’을 하는 그녀들을 ‘낭자’라고 부르며 열광했던 광경은, 지금의 ‘걸그룹’의 공연에 열광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1950년대는 ‘여성국극’의 시대이자, ‘여성농악’의 시대였다.
오늘날 연희계에서도 ‘여성농악’을 중시 여긴다. 나금추, 유지화, 유순자와 같은 여성농악의 예인들이 건강히 살아계시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심에 크게 감사한다. 그런데 여성농악은 이분들에게 한정되는 것일까? 아니다. 보다 많은 팀들이, 많은 방식으로 ‘여성’이 중심이 된 우리의 ‘연희’를 알렸다. 남성중심의 농악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시민)에게 어필했다.
한 예로 남원춘향여성농악단을 들 수 있다. 여기 출신으로 크게 이름을 날린 분이 오갑순, 안숙선, 안옥선 등이다. 그녀들의 농악에는 남성들이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섬세함이 있었고, 다정함이 있었다. 이들의 공연은 ‘농악’을 중심으로 하지만, 당시 ‘여성농악’을 하는 그녀들은 노래와 춤에도 두루 능숙했다.
여성농악은 아쉽게도 1970년에 들어서면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런 원인에 대해선 다각도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여성농악’의 내부로 눈을 돌려보면 더 이상 ‘낭자’라고 부를 여성들이 농악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낭자’라고 부르면 좋아해야 할 여성인재들을 농악분야(연희분야)에서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남원춘향여성농악단’은 그 당시 ‘남원’이 국악의 본향임을 알리기 위해서, 고도의 트레이닝을 거친 예술적 ‘전략상품’이었다. 지금의 k-pop 분야에서 걸그룹을 길러내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8년 새해 벽두, 국악계의 여성인력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유독 연희분야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우수한 여성인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분야의 기성과 신진이 머리를 맞대고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