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7일 인쇄
2018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1월호 통권 503호 |2018년 12월 12일 수요일|
 

춤 스크랩북

 

고향(故鄕)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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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화(趙東華)(月刊 춤 발행인)

지난번 ‘고향방문단’에 껴지는 줄 알았는데 ‘평양사람’이 아니어서 결국 빠져버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고향에 두고 온 둘째딸을 만나야 하니 “오래 살아야지, 오래 살아야지” 하셨는데 91세까지만…. 더 기다리시지 못하고 세상 뜨셨는데 언제 다시 그 힘든 ‘방문단’이 생겨 내가 낄 수 있을지 기약할 길 없이 또 한봄을 맞이한다.
두만강변 내 고향.
내가 떠나온 후에 직접 목격자의 입을 통해 들은 고향소식은 1·4후퇴 때 서울로 올라온 중학동창 Y군한테서의 것 하나뿐, 기타의 것은 모두 풍문들, 그러니까 Y군이 북간도에서 나오면서 우리 집엘 들렀더니 여동생이 낮은 음성으로 “오빠가 봄에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더라는 것. Y군이 우리 집에 들린 그때가 그해 여름이었는데 내 동생이 점심을 먹다말고 나왔기 때문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어떻든 이 생생한 동생에 대한 현장소식을 나는 그 후 40년 가까이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수백 번 수천 번 상기하여도 가슴 찡하는 Y군의 말, 내 한 번 동생을 만나지 않고는 잊힐 일이 아니다.
며칠 전 오후 남대문 지하상가로 집사람과 함께 구경 갔었다. 이런 곳이 있다는 말은 옛날부터 들어왔지만 정작 목격하는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물건, 그 다양하며 아름다움. 붐비는 손님들…. 이런 것들이 온통 이 일대 지하로 지상으로 꽉 찬 채 끝난 데 없이 이어지는 풍요로움. 내게는 언제나 이런 한국의 풍요로움을 대할 때마다 ‘북한 사람에게 이런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하는 일종의 학대심리에서 얻어지는 행복감 같은 것이 있다.
붐비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풍경들. 아무렇게나 차리고 나선 여행객들의 행색들. 그것이 사치하든 평범하든 간에 풍성하고 자유스러움에 마치 나는 내가 이룩한 부(富)처럼 대견하고 행복해지는 것은 고향=북한의 일들과 연결되는 감정 때문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사실 독선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월남해 와서 사는 사람들은 남한 사람보다 대한민국의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함이나 자유에 대한 행복함이 곱절은 되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저쪽의 실정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진정 그 아픔을 누가 더 느끼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 삼형제 모두 서울로 올라왔는데 동생은 사랑하는 사내 때문에 혼자 거기에 머무른다기에 나는 간곡한 편지를 몇 번이고 썼었다. 그러나 오빠의 설득력이나 위엄은 멀리 떨어진 거리 때문에 효력이 없었고 마침내 어머니는 다시 38선을 넘어 그의 혼례식을 치러주어야 했다. 사랑이란 것, 남녀의 사랑이란 것은 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골리 원작의 「대장 부리바」의 영화도 그래서 인상적이다.
적장의 딸과의 사랑 때문에 자기 부족을 배신하고 족장인 아버지의 기대마저 저버리고―적을 위해 싸우는 한 젊은 까자끄의 숙명적인 사랑의 이야기, 당시 나는 내 말을 그처럼 잘 순종하던 동생의 달라진 태도에 얼마나 큰 분노와 슬픔을 맛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 이내 잊혀지고 그저 보고 싶은 사람으로 그 후 40년 가까이 살아오고 있다.
이제는 그 애도 60세. 북한의 60세면 필경 남한의 70세 정도로 뵐 테지 이렇게 생각만 하여도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 애는 20세, 지금 나의 대뇌속의 영상은 20세의 얼굴뿐 설혹 남루한 옷을 입었더라도 그 얼굴 이외 다른 얼굴의 동생은 상상할 수가 없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좋은 옷만 보시면 언제나 “…이런 옷도 못 입어보고…” 하시는 주어(主語) 없는 혼자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이북에 두고 온 동생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언젠가 동생이 설빔으로 해 입은 옷, 그 옷이 아까워서 입지 않고 있다가 그것이 갑자기 작아져서 입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슬퍼하더란 아주 옛날 옛날 어려서의 동생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그 딸 생각이 나실 때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말씀하시던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년은 그 보고 싶은 딸이 이북에 있다는 것도 만나게 해달라고 그처럼 애원하시던 그 기도도 모두 잊고 앞마당 돌에 황홀이 앉아서 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간혹 고향의 꿈을 꾼다. 이남 땅에 와서 산지가 고향서 산 햇수의 거의 곱절의 세월인데….
인간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것은 필경 물고기의 모천(母川)처럼 잊히지 않는 것인 모양이다.
꿈속에서 평상시처럼 동생을 만난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매번 나는 빨리 서울로 도망가야 하는 뭔가에 쫓기는 것 같은 그런 상태로 초조히 헤어지곤 하기 때문에 별말 나누질 못했다.
그리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집을 찾는 그런 순서가 되는데 향두막 앞 갈림길에서 집 쪽이 아닌 옆길로 찾아들게 되고 어떤 막다른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가 그 집 마당 한가운데 내가 혼자 외롭게 서 있다가 힘들게 담장을 넘는 그 담을 넘어야 집으로 가게 된다는…. 대개 이런 공식의 꿈이다.
이상한 일은 우리 골목길에 향두막이 있는 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로써 보통학교로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그 향두막이 없어져버린 것인데 아직도 고향의 꿈의 주제 속에 등장하는 것은 뭐에 연유되는 것일까.
그때 누나와 나는 늘 이 향두막 앞을 지나다녔다. 귀신이 나올 것 같아서 언제나 둘이서 달려서 그 앞을 통과했었던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때때로 짓궂은 누나가 갑자기 나를 내버려주고 혼자서만 그 앞을 통과해버리곤 했기 때문에 나는 겁에 질려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뒤를 따라 그 앞을 지나야 했던 일도 기억한다. 허나 공산당은 고장의 관습이 살아있으면 통치에 지장이 된다해서 토박이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서로 섞어버렸기 때문에 내 동생도 지금은 고향에서 살지 못하니 따지고 보면 꿈마저 허망한 것이 되어버렸다.
어떻든 나도 어머니의 소망처럼 동생을 만나기 위해 ‘오래오래 살아야…’ 할 텐데 그때까지 동생이 살아 기다려줄는지 그것이 늘 안타깝다.

<정우(政友)> 1986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