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7일 인쇄
2018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1월호 통권 503호 |2018년 9월 26일 수요일|
 

춤 스크랩북

 

상상력·환상 가지고 긍정적으로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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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화(趙東華)(月刊 춤 발행인)

한국인은 우리 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고 훌륭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단군 할아버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런 춤을 췄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해외 공연을 다녀온 무용가들일수록 우리 춤의 우수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말은 “그렇지 않고서야 외국인들이 한국춤에 대하여 그처럼 열광적으로 박수를 보낼 리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국 사람인 나도 이런 말이 나쁠 리가 없다.
그러나 정말 무용가들의 말대로 우리 춤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처럼 훌륭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들 인도 춤이나 스페인 춤처럼 그들이 우리 한국춤을 배우려 들지 않을까.
우리 춤을 보고 기립박수를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곧 ‘가장 훌륭하다’는 신호일까. 외국인들의 눈에 이방(異邦)의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신기한 민속의상과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 다른 나라의 민속춤보다 흥미로워서 박수를 좀 크게 쳤다는 정도가 아닐까.
만일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인들이 그들의 민속춤을 가지고 세계 공연 여행을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의 입에서 무슨 보고가 있을까. 필경 자기들의 춤에 대해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준 얘기를 할 것이 분명하다. 사실 그들의 귀에는 그렇게 크게, 감격스럽게 들릴 테니 말이다.
말하자면 민속춤은 예술이기보다 하나의 문화로서 그 종족이나 민족의 심성(心性)이고 애환이기 때문에 ‘제일이다’라는 평가는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인도 춤이나 스페인 춤은 단순한 ‘문화’ 차원에서만 아니고 그 춤의 기교나 기능이 무용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니까 비교 평가하여도 객관성이 있다.
그러나 아직 세계인에게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춤의 경우 우리의 자랑은 결국 자화자찬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우리 한국을 대표하고 춤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는 ‘한국무용’이란 이름의 춤 ― 그러니까 국립무용단의 송범 씨가 하고 있는 춤이나 서울시립무용단의 문일지 씨가 하고 있는 춤 ― 을 무용사적 명칭으로 하면 신무용(新舞踊)이라고 하는데, 이런 형태의 춤은 1930년대 조택원·최승희가 우리 민속춤을 극장용으로 손질한 데서 비롯된다.
본래 민속춤이란 보며 즐기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참가하여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 기교가 단순하며 쉽고 반복되어진다. 그러나 무대용(극장용) 춤을 만들려면, 다시 말해서 구경거리로 하려면 여기에 여러 가지 요소를 집어넣어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서양식 음악도 수용하고 템포도 변화 있게 하여 팬터마임적 요소도 가미한 것이 곧 신무용이다.
이렇게 하니까 신무용은 큰 반복이 없이 2~3분간 출 수 있는 춤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바로 이 권태로움을 주지 않을 수 있는 동안인 ‘2~3분간의 시간’, 최승희는 이 한계성 있는 시간에 착안하여 마침내 명성 있는 무용가로 등장한다. 그의 작품은 거의 모두 2~3분짜리 소품(小品)들인데, 그는 앞에서 말한 무대효과용 여러 가지 요소를 적절히 배합하여 춤을 췄으니 인기가 있었을 수밖에.
그런데 그 후 신무용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이 춤이 왜 그렇게 재미있고 인기 있나 하는 비결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작품을 5분, 7분, 10분짜리로 늘여버렸다. 이렇게 되어 같은 기교의 반복밖에 될 수 없으니 재미가 없어졌고, 그래서 신무용의 관객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복고조(復古調) 붐이 겹쳐 신무용가들은 당초 무대 무용가로서의 긍지마저 혼돈할 정도로 방향 감각을 잃고 무속(巫俗)이나 민속춤으로 되돌아서는 혼란 상태를 맞이한다.
그러나 대학 출신의 젊은이와 직업 무용단들에 의해 신무용은 새롭게 탈바꿈하는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묘사적 수법(描寫的手法)에 머물러 있던 신무용에서 오늘의 춤 ― 가칭 한국현대무용 ― 은 서구적 현대무용의 기법까지 수용하면서 표현적 수법으로 변신함과 동시에 시간적 한계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어떻든 무용 작품이 관객에게 주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작품의 내용 자체가 주는 것으로 이것은 주로 현대무용들이 내용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공연예술로서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는 재현예술(再現藝術)의 경우 연기력이나 테크닉(技巧)이 주는 경우이다. 발레가 여기에 해당되는데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내용이 없어 공허하며 감명을 주기가 어렵다. 그러나 무용 작품은 이것들을 따로따로 나눠서 생각한다거나 감명 받는다는 것은 힘들다. 훌륭한 작품이 되려면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감명’이란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춤의 가장 행복한 관객이 되는 것은 자기의 상상력과 환상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보는 일일 것이다. 상징예술인 춤은 관객의 교양과 견식(見識)에 따라 제각기 이해되며 받아들여진다.
우리 춤에서는 정감 있고 멋있게 춤추는 것을 가리켜 ‘춤집이 좋다’고 말한다. ‘춤집’이란 외형적인 능숙함뿐만 아니라 익숙한 감정의 춤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발레에서는 춤집과 같은 뜻의 말에 ‘발론(ballon)’이란 말이 있다. “발론이 있는 사람”, 이렇게 말한다.
무용비평가의 기준이 대개 춤집이나 발론이 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예컨대 카메라로 춤의 대가(大家)의 춤추는 모습을 찍으면 그 장면 장면마다 모두 포즈가 아름답다. 그러나 미숙한 춤꾼인 경우 아름다운 포즈의 사진을 얻기가 힘들다. 이것은 발론이 없기 때문이다. 춤 잘 추는 사람의 춤이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제대로의 발론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론은 훈련의 힘으로 어느 정도 교정할 수는 있겠으나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한다는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발론의 무용적인 뜻은 유연함, 탄력성 등이 합쳐진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높이 뛰었을 때 공중에서 아름다운 포즈를 취하게 되는 그 순간은 마치 공중에 그대로 멈춰 서 있는 듯, 그리고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가볍게 땅 위로 사뿐히 내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의 무용가를 ‘발론이 있는 무용가’라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춤은 말이 없는 상징적 예술이므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춤은 마음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된 마음의 말이라면 같은 마음을 가진 관객에게 통하지 않을 리가 없다. 만일 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품 자체의 내용이나 연기가 작품 이전의 소박함에서 넘어서지 못했든지 아니면 보는 사람의 부정적인 태도 탓일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훌륭한 작품이라면 별 어려움 없이 관객들 영혼에 전달되어 감명의 파도를 일으킬 것이다.

사보 <럭키금성> 1986년 2월호 “특집/예술세계에의 초대1 감상가이드-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