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빌티존스&어니제인컴퍼니 빌 티 존스 안무 『더 딥 블루 씨(The Deep Blue Sea)』 1월14일 뉴욕라이브아츠(New York Live Arts)
막이 없는 무대는 아래로 내려다보이게 만들어져 있고 무대 위에는 관객들을 위한 간이용 의자가 크게 둘러 놓여있다. 의자에 관객을 앉히면 무대는 앞도, 옆도, 뒤도 구분이 없는 흡사 마당놀이 무대와 같은 구조의 모습이다.
나이든 흑인 무용수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무대에 나와 움직이고 있다.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몸의 형태와 움직임만 보면 잘 단련되고 훈련된 20~30대 청년과 다르지 않다. 공연 시간이 임박해 객석으로 관객들이 입장하고 있음에도 그는 무대를 돌며 같은 동작의 반복을 지속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되 무대의 왼쪽 뒤편은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그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무대 위에 마련되어져 있는 좌석에 조심스럽게 찾아가 앉는다. 무용수는 관객들이 들어오고, 앉는 것에는 관심 없이 자신의 동작에만 몰두하고 있다.
언뜻 그가 같은 동작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도된 몇몇 동작만 같을 뿐 단일 화면에 담기는 영상미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시계 반대로 움직이는 방향성과 무대 하수 후미를 들어가지 않는 동선은 변함없이 지켜진다. 기세를 보아 공연이 끝날 때까지 틀의 변화는 없을 거라 추측된다.
얼마나 돌았을까? 순간 한 명의 무용수가 합세하며 기존의 구도에 변화를 가하며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다. 둘이서 또 얼마나 돌았을까? 다른 한 명의 무용수가 다시 합세하고, 곧 또 다른 무용수가 합세 된다. 이렇게 한 명으로 시작되었던 공연은 총 10명의 무용수로 늘어난다. 무용수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무대에서 표현되는 느낌이 풍부해지며 시각화는 더욱 극대화된다.
나이든 무용수는 혼자 독백하듯 대사를 한다. 그의 대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의 후반부이다.
“나는 지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생명, 자유, 행복추구 등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받았다는 (중략) 나는 지금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형제가 되는 꿈입니다.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나서서 절망의 산에다 희망의 터널을 뚫겠습니다.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나서서 어둠의 어제를 광명의 내일로 바꾸겠습니다.”
열 명의 무용수는 한배를 탄 듯 서로 어울려 무대를 돈다. 무용수들은 한 운명을 헤쳐나가듯이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며 꾸준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임을 이어나간다. 한 명으로 시작해서 열 명을 이루었지만, 끝날 즈음에는 반대로 무용수들이 하나둘 무대를 빠져나가며 나이든 무용수를 홀로 남겨 놓은 체 모두 무대에서 사라진다. 군중 속의 외로움과 홀로 된 외로움은 수식어만 다르지 그냥 외로움 자체이다.
홀로 남겨진 무용수는 조명이 어두워질 때까지 쳇바퀴 돌 듯 같은 동선으로 반복해 움직인다.

1952년 미국에서 출생한 빌 티 존스(Bill T. Jones)는 66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안무가, 무용가, 연극인, 작가, 그리고 뉴욕라이브아츠(New York Live Arts의 전신은 Dance Theater Workshop이다)의 예술감독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빌 티 존스는 1982년 아니 제인(Arnie Zane)과 무용단을 창단한다. 그들은 성차별, 인종 차별, 동성애 등 사회적 쟁점들을 다룬 작품들을 내놓으며 무용계에 변혁을 일으킨다. 1988년에 아니 제인이 에이즈로 사망함에도 빌 티 존스는 현재까지 본인과 그의 이름을 그대로 무용단의 이름으로 유지하면서 그와 협업했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에 공연된 빌 티 존스의 신작 『더 딥 블루 씨(The Deep Blue Sea)』는 2018년~2019년 시즌작품으로 초연해 올릴 작품을 1월 14일 단 하루만 프리뷰 형식으로 공연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대표소설 「모비 딕」에 등장하는 어린 흑인 선원 ‘핍’의 시선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핍’을 통해 바라본 인간(선상의 선원들) 내면의 외로움이 작품으로 표현되었다. 이번에도 그는 자기의 안무표현 방식인 문체적인 접근을 보여주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작품에 녹여내며 호소력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더 딥 블루 씨』에는 특히 그의 우울증세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창단 파트너를 넘어 인생의 파트너였던 아니 제인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슬픔, 그 또한 동성애자로 살아오면서 겪어왔던 고통, 그리고 흑인으로 태어나 미국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느낀 어려움 등등. 그 모든 것들로 인해 현재까지 앓고 있는 지독한 우울증까지…. 그가 맞닥뜨리고 헤쳐나가고 있는 현실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그의 삶 내면이 곧 그의 작품이고, 그 절실함과 절박한 현실이 그가 작품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