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년 5월 28일 인쇄
2018년 6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6월호 통권 508호 |2018년 10월 20일 토요일|
 

춤 스크랩북

 

텅 빈 明洞에서
- 여름날의 삽화




조동화(월간 「춤」 발행인)

아이들이 휴가에서 돌아온 후에는 우리 두 늙은이는 좋다는 데를 찾아 나설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집 지킬 사람이 없고 우리야 떠난다고 하여도 멀리 갈 것도, 또 물에 들어갈 것도 아닌데 모두들 나서는 북새통에 같이 끼어들 수야 없지 않은가. 그것도 집을 나서면 고생뿐. 어디 집처럼 편한 곳이 있을라고. 그래서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의 우리 여름휴가는 어른이 쉬기 위한 것이었기보다는 초롱초롱한 눈의 어린 것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준다는 그런 의무감 같은 것이 더 컸었다. 그러지 않고야 넉넉지 못한 신접살림에 여름마다 바다를 찾아갈 용기를 낼 수 없는 일이다.
허나 애들이 공부에 쫓기면서부터 ‘휴가’라는 말이 없어져버렸으며 그놈들이 대학생이 된 후로는 아예 저희들끼리만 떠나버려서 마침내 우리 늙은이들에게는 휴가라는 것이 소용없는 것처럼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 오후는 두 늙은이는 마음먹고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을 나섰다.
사실 이제는 찾아갈 친구도 없고, 꼭 가보고 싶은 곳도 별로 없는, 허나 산책 정도의 거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明洞(명동)거리가 바로 그것. 더욱이 그날은 휴가철이고 일요일이라 차 세울 곳 한 곳 정도는 남아 있겠지 하는 생각이 명동으로 결정하는 데 힘들지 않았다.
생각대로 명동 중심 가까이에 쉽게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장마가 걸친 다음날이고 젊은이들이 휴양지로 많이 빠져나가서 그런지 거리는 그야말로 텅 빈 것처럼 조용하였다.
옛 국립극장 네거리에서 남산 퇴계로 그쪽까지의 거리가 환히 틔어 마치 우리는 외국의 어느 청결한 길목에 서 있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우리 젊은 날의 아지트(?)였던 찻집들은 건물들이 뒤로 물러앉으면서 모두 개조돼버린 데다가 路幅(노폭)도 그만큼 넓어져 이제는 어디서도 옛날의 낯익은 그 명동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이 이 거리의 분위기나 다정한 情景(정경)은 옛날과 하나도 다름없이 그대로 거기에 간직되어 있는 사실이다.
대체 명동. 이 거리의 이런 恒久感(항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컨대 국립극장 그 건물이 거리에 그대로 있고, 명동성당과 서편 큰길 넘어 미도파백화점 등. 이 블록과 저 블록과의 익숙한 距離(거리)며 그 사잇길과 길 양편에 지어진 아담한 건물들이 그렇게 인상짓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웬일일까. 나만이 낯설은 늙은이가 되어 불쑥 거리에 서 있다는 그런 느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절대 안 되는 곳에 지금 내가 온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젊을 때 내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기대나 약속은 결코 이것은 아니었고 우리의 바람직한 성장의 모습은 필경 이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렇다고 ‘바로 이것이다―’ 라는 像(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저 ‘명동’이라는 풍요로운 분위기에 취하여 20대의 젊음을 날려버린 하잘 것 없는 빈껍데기가 여기에 서 있다는 느낌일 뿐.
그렇지만 여기서 알게 된 많은 친구들로 해서 후회는 않는다… 는 신념도 있고. 찻집엘 들어갔다. 중국대사관의 앞뜰이 내려다보이는 큰 유리창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붐비는 명동거리 한복판에 이런 조용하고 古風(고풍)의 숲과 정원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부터가 행운에 속하는 일이었다.
차 맛도 좋고 냉방도 알맞고 차를 나르는 짧은 치마의 아가씨들. 그리고 쌍쌍이 앉은 젊은 손님들의 건강한 분위기―늙은이의 피서처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거기에 음악도 괜찮았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내 고향 교회에 이 노래를 잘 불렀던 여인이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나는 나의 앞날이 막막하여 거의 절망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작은 교회에서의 그의 「아베마리아」는 마치 구원의 기도처럼 위안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만일 그때 내가 그와 결혼이라도 하였었더라면 지금 나는 북한에서 살고 있을지 몰라. 아니 벌써 숙청돼서 죽었을지도 모를 일…. 어떻든 그랬으면 나는 지금 명동에 앉아 차를 마시며 행복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겠지. 어느 여름 나는 이 명동거리에서 지금의 집사람과 만나 오늘까지 33년을 동고동락하고 있다.
나는 그때 늙음이란 세월이 나에게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말하자면 여자 50세가 넘으면 도저히 같이 살 수는 없을 것으로 단정한 여성관(觀)을 가졌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지금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아내는 그 나이보다 열 살이나 더 위인 60세의 할머니는 어떻게 되는가. 정말 어리석고 어리석은 옛날 옛날의 내 모습. 그러면서 지금 70의 나는 적어도 여자에 관한 한 양보나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으니… 어리석음이란 죽음까지는 같이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일까.
옛날 우리 집 정원은 크고 아름다웠다. 우리가 휴가를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 정원이 그렇게 달라 보일 수가 없었다.
이른바 歸鄕(귀향)의 기쁨은 항상 나는 우리 정원에서였던 것이 생각난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아이들이 휴가에서 돌아올 테지. 그러면 옛날 나처럼 우리 아이들이 정원에 환성을 올려줄까. 늦여름의 정원은 하루만 손보지 않아도 거미줄과 뭐위 잎새가 꽃나무를 덮는다. 그리고 외국에서 사는 딸한테서 올 전화도 있고― 멍청히 찻집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 계집애 다섯 살 때였던가 바다가 더러워지면 어떻게 해… 하면서 물속에서 오줌 누지 못하겠다고 호소했었지… 벌써 애 엄마가 됐으니 우리가 안 늙겠어? 어떻든 이런 말이 우리에게는 휴가보다 훨씬 즐겁다.

- 문학사상 199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