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년 5월 28일 인쇄
2018년 6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6월호 통권 508호 |2018년 10월 20일 토요일|
 

춤 스크랩북

 

춤을 위해 바친 지난 시절의 연가
- 또 다른 나의 길




조동화(무용평론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시작된 무기분석실험.
지독히 역겨운 황화수소(H2S) 가스―그 단백질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실험실 속.
그래서 추운 날에도 우리 팀은 줄곧 밖에 나와서 그놈의 가스를 다루곤 했었다. 더구나 ‘공부가 취미’였던 S조교.
그 사람은 실험리포트를 제출받았으면 되었지 또 저녁 늦게까지 한 사람씩 불러놓고 면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던 까다로운 성품이었다.
어떻든 이런 일들이 공연히 약이 오르고 낭만을 즐기고 싶었던 대학 1학년을 그만 망쳐버리게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 3학년 때였었다.
벤졸케룬에 다른 분자 하나씩 붙여나가던 방향성 벤젠 냄새의 실험실에서 새삼 흰 가운의 내 모습에 어떤 긍지 같은, 그리고 이상한 숙명 같은 것과 연결되는 감상으로 ‘어차피 이 공부 끝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비 내리는 어느 오후의 일도 기억한다.
그러나 이때 ‘약대 정기 레코드감상회’를 만들 때의 즐거움은 잊을 수가 없다.
공부에 지친 친구는 나 말고도 의외로 많았다. 아니, 대학생활을 공부에만 파묻혀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낀 친구들이란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른다. 어떻든 이 지옥에서 도망하고 보자는 그런 돌파구로서 이 ‘감상회’를 만들게 된 것이다. 우선 음악 해설자는 외부에서 구해오고, 예쁘게 프로그램을 만들고 해서 6·25전쟁 전 그 아기자기하게 아름답던 명동거리의 파출소 옆 골목 바른편 첫 번째 찻집 ‘라뿌룸’에서 우리는 첫 감상회를 가졌었다.
신문지 1/4 크기의 작은 포스터 2장을 만들어 학교현관에 한 장, 그리고 다른 한 장은 우리대학과 나란히 있던 사범대학 정문에 붙였다.
이것은 필경 ‘우린 이런 행사를 한다. 알겠지’ 하는 그런 데몬스트레이션의 심리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약대생 7~8명과 의외로 타교생 4~5명이 모였다는 것이 나를 흥분시켰다.
처음 해보는 감상회라 해설자의 이야기나 음악소리는 하나도 내 귀에 들려오지 않았고 그저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성취감, 그것이 그리도 충족했었던 일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의 약대생의 주가는 유난히 높아 우리 감상회에 해설자로 초청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여겼고 그로인해 지금까지 연결되는 음악가도 몇 분 계시다. 이 감상회는 부산 피난지에서도 계속되었고, 정확치는 않으나 내가 졸업한 지 20년쯤 되던 지난 1970년대 초 어느 날 ‘서울약대 정기 레코드감상회’ 명의의 초청장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하여 창시자로서 환영을 받았던 감격스러운 일도 기억난다. 이날의 감상회장은 소공동에 있는 큰 찻집이었는데 모인 학생 수도 100여명, 거기에 교수들도 여러분 참여한 그런 큰 모임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무튼 이들은 국가시험을 치러야 하는 우리 때 옛날보다도 훨씬 더 구속적이고 공부벌레를 만드는 그런 학풍 속에서 아예 체념되어 버린 그런 얼굴을 한 후배들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그날 밤의 내 생각을 말한다면, ‘아! 나는 정말 용케도 이 무서운 굴레 속에서 뛰쳐나왔구나~’ 하는 것이었다. 필경 이러한 생각이 나를 무용이나 연극에 관심 갖게 했는지 모른다.
무용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또 약간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말하자면 ‘내가 무용 편에 서준다~’라는 좀 건방진 생각이 그것이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나와 무용에 대한 상관은 이런 ‘건방짐’이 없었던들 성립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대학생이 무용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의외에 속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무용연구생 모집’
어떻든 이런 신문의 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거기엔 나 말고도 고려대, 연세대 등의 문과대학생들도 여러 명이 왔었다.
이들과 사귀면서 느낀 것은 문과계통 학생들의 높은 교양(?)이었다. 특히 문학관계의 사람 이름이나 정의 같은 것을 줄줄 말할 때는 나는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그래서 그들이 하고 있는 ‘대학극회’라는 모임에 애써 끼어들었다. 나를 끼워준다는 것에 몹시 영광스럽고 황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여기서 한 일이란 회비나 내고 기껏 잔심부름이나 하는 일이었지만 이 분위기가 나의 완성에 절대 필요한 대목이 된다. 예컨대 프로그램을 만들고 소도구를 구해오고, 학교강당 같은 공연장이 빌려지면 먼저 가서 의자를 바로 잡고 청소하고 하는 역할이었는데 그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작품도 많이 읽고 하는 등의 그런 의식적인 행위가 결국 나를 무용평론가에까지 연결시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고려대학 연극부가 피난처 대구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의상과 소도구 포스터 등을 나한테 위촉해 왔었다. 우리대학은 부산 영도에 있었던 때. 어떻든 나는 내 실력이 이처럼 인정되었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공부를 접어두고 대구로 가서 약 한 달 동안 그 일을 맡아 하였다. 때문에 학점을 따지 못해 졸업을 1년 늦춰야 했다. 그 당시 우리의 피난살림은 내가 빨리 졸업해야 하는 그런 처지였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초량 구제품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그런 처지였는데도 나는 이렇게 형편없이 방황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약학’은 내가 원해서 택했고 그 어려움이 매력적이었으면서도 나의 낭만벽과 ‘6·25’가 나를 이 길에서 밀려나게 하였다고 변명하고 싶다.
사실 이 변명밖에 지금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있겠는가!
서울수복 후의 한국 무용계는 거의 황무지였다.
이름 있는 무용가·평론가는 모두 북쪽으로 가고, 죽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나에게 하나의 찬스가 되었다. 나처럼 소위 무용이론을 공부한 대학생은 없었으니까.
마침 신문 문화부에 나의 중학교 선배가 있어 그의 권유로 무용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러 결국 지금 내가 무용전문 월간지 「춤」을 발행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춤」은 13년째 계속하고 있다.
사보 삼진 1988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