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인쇄
2018년 7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7월호 통권 509호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인터뷰

 

한평생 불태우고, 한평생 감동한다! 세계 제일의 콩쿠르를 만들기 위해
- 허영일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집행위원장과




조은경(曺恩慶)(본지 주간)

■ 때 : 6월16일 오후2시
■ 곳 : 본지 편집실




─ 춤에 입문한 계기가 궁금하다. 그간의 경력도 알려달라.
* 전남여중 1학년 때 처음 춤을 추었다. 사실 초등학교 때 당시 이름을 날리시던 주리 선생님이 발레리나로 튀튀 입고 왕관 쓰고 토슈즈 신고 만화의 주인공으로 나오셨는데 그렇게 멋져 보였다. 그때부터 꿈을 꾸다가 중학교 들어가며 무용반에 들었고 그곳에서 이화여대 나온 백선행 선생님께 처음 배우게 되었다. 이화여대 한국무용파트에 입학해서 최현, 한영숙, 김천흥 선생님들께도 가르침을 받았고 민속학과 미학 쪽에도 관심이 많았다. 결혼 후 하와이대학에서 민족무용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세계무형문화의 배경, 인류학적 측면에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귀국 후 석사를 이화여대에서 받았고 일본 오차노미즈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논문 박사과정을 밟았다. 우리와는 제도가 다르다. 당시 「객석」에 평론이 당선되어 평론가 명함을 갖게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평론가라고 나를 특별하게 대우해주었다. 일본에서 내 논문의 주제는 ‘춘앵전’이었다. 한국에도 춘앵전이 있지만 일본도 춘앵전 연구가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의 전통과 관련 유명하신 분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에 응모할 때도 기존에 한국에는 없었던 부분이어서 관심을 받았다. 민속은 있었지만 민족무용에 관한 것은 새로운 부문이었다. 무용원 이론과에서 미학, 과학에 이어 민족무용연구로 문화인류학적 측면, 사회문화적 배경 등의 연구를 맡게 되었다. 한예종 시절부터 지금까지 세계민족무용연구소장을 맡고 있고, 한예종 평생교육단을 책임지고 있다. 올해 15회를 맞는 서울국제무용콩쿠르를 창단해 지금까지 집행위원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 「서울국제무용콩쿠르」 15회를 축하한다. 「서울국제무용콩쿠르」는 어떤 대회인가?
* 「서울국제무용콩쿠르」는 시작 단계에서는 「서울국제무용·음악 콩쿠르」로 기획되었었다. 당시 서울국제문화교류회(SICF)는 회장으로 이강숙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부회장으로 김남윤 현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원장과 내가 맡고 있었는데, 한국에 국제 콩쿠르가 없었기 때문에 서울을 아시아지역 문화·예술의 본거지로 만들어보자는 의미로 추진했다. 문화관광부에서 봤을 때 세계민족무용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이론과 교수다 보니 치우침 없이 활동하리라 여겨 제안을 한 것 같다. 재정적으로 여유없는 국내 무용 인재를 공정하게 심사하고 해외로 뻗어나갈 기회를 줄 수 있겠다고 했고 거기에 공감을 한 바 2004년 시작되었다.
「서울국제무용콩쿠르」는 단순한 경연 목적이 아니다.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유명 심사위원의 지도하에 최종심에 오르지 못한 무용 인재들의 테크닉을 보완하는 원포인트(one point) 레슨을 진행한다. 발레, 민족무용, 컨템포러리에서 각기 워크숍을 진행해서 외국에서 온 참가자들에게 한국 무용을 배울 수 있게 하고 한국 참가자들에게 외국의 민족무용을 배울 수 있게도 하며, 웨인 이글링 등 유럽을 포함한 세계적인 스타들과의 만남이 원포인트 레슨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로잔국제발레콩쿠르」 집행위원장이었던 찰스 겝하드가 와서 보고는 「서울국제무용콩쿠르」에 발레, 컨템포러리뿐만 아니라 민족무용 경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교류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한번은 세계 최초의 국제무용콩쿠르인 「바르나국제콩쿠르」 창설자 에밀 디미드로프 하지마노트를 초청한 적이 있다. 그가 젊은 무용수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의 교육이라고 했는데, 나 또한 이에 공감한다. 장학금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스칼라십을 받아왔는데, 영국국립발레학교, 덴마크안무학교, 모스크바발레학교, 브뤼셀국제발레학교, 파리컨서바토리, 미국 레드포드대학 섬머인텐시브코스, 영국국립발레학교, 덴마크왕립발레단, 프리니티 라반 컨서바토리, 미국 에일리스쿨, 덴마크 국립컨템포러리무용학교 등이다. 특히 지난 14회 때부터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3명에게 각각 2억 원 상당의 학비 지원을 통해 4년간 대학 입학의 기회가 주어져 후학 양성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 올해 대회의 규모와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 올해는 콩쿠르 15주년으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서울국제무용콩쿠르」를 정산하는 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콩쿠르에서 입상한 무용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스타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콩쿠르 10주년 되던 해부터 이들을 초청하면서‘월드 갈라’를 시작했다. 2016년에는 다양한 국적의 민족무용 참가자들이 증가하면서‘민족무용 페스티벌’이 생겼다. 2017년에는 ‘발레 페스티벌’이 생겼으며 올해는‘컨템퍼러리 페스티벌’을 추가하였다. 자연스럽게 콩쿠르는 ‘경연’과‘페스티벌’,‘콩쿠르 출신의 월드 갈라’로 3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올해는 15주년을 맞이하여‘안무 경연 부문’을 신설했다. 안무 능력을 개발하여 댄스 마켓이 형성되어 다양한 콘텐츠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또한 우리나라 무용계의 위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올해 콩쿠르는 참가자수가 536명이고, 참가국수는 중국, 대만, 싱가포르, 일본, 미국, 몽골, 베트남, 영국, 프랑스, 쿠바, 마카오 등 한국을 포함하여 총 12개국이다. 특히 이번‘월드 갈라’는 우리나라 발레스타인 김주원과 정영재가 파드되를 선보인다. 또한 볼쇼이발레단 수석무용수인 다리아 코즐로바와 아르테미 벨야코프가 파드되를 추는데 기대가 된다. 전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인 이정윤이 한국무용을 선보이고, 또한 일본 인간 국보의 자제인 주라쿠 하나야기와 라쿠아야 하나야기가 출연하여 가부키 하나야기 유파의 문화재를 보여줄 것이다. 1회 때 금상을 받았던 예카테리나 오스몰키나를 특별히 초청해서 파드되를 선보인다. 8회 때 수상자였던 브루클린 맥도 초청했다. 역시 파드되를 춘다. 수상자이자 남아메리카무용단 소속의 윤열이 돌아오며, 컨템퍼러리에서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안남근의 2인무가 펼쳐진다. 이외에도 다양한 스타 무용수들의 공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0주년 이벤트로 시행한 적이 있지만, 15주년에도 서울국제무용콩쿠르의 집행위원과 심사위원이 무용 인생에서 아끼는 소장품을 기부하여 각 분야별 참가자들에게 선물하여 콩쿠르에 대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도 이벤트다. 2017년 「북경국제콩쿠르」에서 만난 플리오 보카가 심사위원장으로 오는데 그가 참가자들에게 “Give me a soul!”이라고 한 말이 아직도 내 귓가에 메아리친다.

─ 그간의 성과와 업적을 자랑해본다면?
* 국제적인 규모의 행사를 기점으로 「로잔 국제발레콩쿠르」, 「바르나 국제발레콩쿠르」,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 등과 같은 세계적 무용 경연대회와의 지속적이고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국내 무용인재 양성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다. 특히 이전 발레 주니어 부문 수상자는 비디오 심사 없이 로잔콩쿠르 본선에 자동 진출했었다. 이렇게 꿈나무 무용수에게 경연의 경험을 제공하고, 세계 각국의 무용수와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콩쿠르가 끝난 후에도 서로 간에 교류가 있는 것은 커다란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병역특례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남성무용수들이 상상을 뛰어넘는 도약을 했다는 것 또한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시간이 깊어감에 따라 우리 콩쿠르 출신 무용수들이 성장하여 돌아와 ‘월드 갈라’에 서는 모습을 보았고, 앞으로도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들의 무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또한 굉장히 뿌듯하다. 힘은 들었지만 스타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가슴속에는 감동이 메아리치고 모든 어려움을 잊게 해주었다. 분야별 페스티벌은 관객들에게 현대무용의 트렌드, 세계각국의 다양한 민족춤, 각 나라의 발레 수준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 또한 성과였다고 볼 수 있다.

─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계획인가?
* 콩쿠르가 배출한 인재들이 세계로 뻗어나가 성장한 뒤 ‘월드 갈라’를 통해 우리나라에 돌아온다. 궁극적인 목표는 콩쿠르를 통해 차세대 무용수들이 빛을 발하고 세계 수준의 단체에 발탁되어 잠재능력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보태어, 줄리어드 무용부 예술감독 로렌스 로즈를 초청했을 때 그는 콩쿠르 참가자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머무르지 말고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했는데, 이에 공감하는 바다. 앞으로의 목표가 될 것이다.

─ 세계민족무용연구소장이기도 하다. 활발한 활동을 하시고 있는데 연구소 소개도 부탁한다.
* 하와이에서 나는 민족무용을 발견했다. 한일문화정책 자문위원 시절, 일본과 공식적인 교류가 없었을 때 문화 교류의 물꼬를 틔우는 국내 정책 발전 과정에서 한중일 한자문화권의 역사성과 교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한자문화권의 5000년 역사를 돌아보면 문화 전승 과정과 교류 역사 속의 춤으로서 공통분모가 존재해왔다. 그 당시 주장은 교류의 주체가 ‘영화’와 ‘만화’였다. 그래서 나는 영화와 만화와 더불어 일본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춤’을 초청하자고 주장했고, 그런 과정에서 6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노가쿠’를 국내에 초청하게 됐다. 이것이 우리 민족무용연구소의 트레이드마크인 「무형문화재 초청 시리즈」의 전신이고 20여 회가 넘는 연구소의 대표 행사가 되었다.
이후 기부금이 들어와 민족 무용 연구의 자리매김을 위해 연구소를 창립했다. 주로 한중일 민족춤 연구를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며 전공 영역을 확대했다. 그런 배경에는 학술진흥연구재단의 세 차례의 연구비 지원이 연구소의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것이 민족 정체성의 원류를 탐색하는 우리 연구소의 소명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춤 문화를 알리기 위해 콩쿠르에 민족춤 경연을 포함시킨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 어려운 일도 많이 겪으셨는데 정말 그동안 많은 일을 해오셨다. 앞으로 남은 일은 무엇인가
* 자의든 타의든 간에 콩쿠르와 연구소, 평생교육단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건 보이지 않는 신의 응원이라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과정에서 진정성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서 노력했기에 많은 활동이 가능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집과 학교가 내 공간의 축이었던 것 같다. 연구소나 콩쿠르가 발전을 거듭하며 정체되지 않는 밑거름이 되었다.
콩쿠르를 이끌어 오며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고 멋진 콩쿠르가 될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매해 참가자들이 나에게 멋진 감동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일생연소(一生燃燒), 일생감동…” 즉 “한평생 불태우고, 한평생 감동해도, 한평생 깨닫지 못한다” 라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려운 매순간 순간은 눈부신 기회였던 것 같다.
이러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영향을 주신 분이 있다. 하와이 대학의 수미 맥케이브는 나에게 “그래 나는 할 수 있다(Yes, I Can!)”를 가르쳐 주었고, 이화여대의 은사이신 박외선 선생님은 “스승은 학생의 거름이 되어야지 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일본에서 노가쿠의 원로인 노무라 선생님의 초대로 노가쿠 무대에 간 적이 있다. 무대 위에서 노무라 선생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공연자 뒤에서 소도구를 챙겨주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보니 선생님의 역할에 後見人(후견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무대에서 잡다한 것을 챙겨주고 불상사가 일어났을 때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역할을 대신한다. 이 때 후견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앞으로의 희망이라면 나도 무용계에서 노무라 선생님 같은 후견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