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인쇄
2018년 7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7월호 통권 509호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세계의 춤기행

 

나의 시간과 공간은 바로 내가 걷고 있는 길 위에 있을 뿐
- 산티아고 순례 기행




박호빈(朴豪彬)(현대춤·제로포인트모션 대표)

작년 이맘 때,
중요한 한영공동 프로젝트에 집중해야 하는데 내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봄바람이 불어오기 전, 우연히 처음 만난 사람과 스치듯 잠깐 나눈 대화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것이었다. “열흘간 200km을 걷고 왔다”, “원래는 800여 km를 걸어야 하는데…”, “다음에 꼭 다시 갈 것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걷는 것을 좋아하던 내가, 왜 여태껏 걷는 그 자체가 여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지…”
그 이후로 우연히 나눈 이 이야기는 필연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난히 폭우가 잦았고 고온이 지속된 여름이 지나고 제법 이른 추위가 가을을 밀어내고 있을 무렵 난 “100일간 걸어 다니자!” 라는 나만을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동네 호수를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대략 30분이 소요되고 거리는 약 2.5km 정도 된다. 평소 운동 겸 산책삼아 유유자적 빈둥거렸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 10월1일부터 두 바퀴인 5km부터 걷기 시작해서 10일 간격으로 2.5km씩 늘려갔다. 단,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매일 걷는 걸 목표로 했다. 30일이 지난 시점엔 12.5km씩 걷게 된다. 그 이후로 25km를 걷기시작하려면 12월20일이 돼야만 한다. 거의 80여일 만에.그 다음부터는 매 대여섯 시간 20여 일간 25km걷기를 유지하며 컨디션 조절에 들어가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갔다.

그저 걷는 이 단순한 행동은 조금씩 나와 대화를 나누는 내 영혼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수한 시간이다. 명상 혹은 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발을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발의 균형을 의식하고 호흡에 집중한다. 오랫동안 춤을 춘답시고 내 몸을 함부로 다루어 왔다. 어찌 보면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몸은 영혼이 잠시 머무르는 장소이다. 이를 “스케노스”라 부른다! 그리스원어로 ‘스케네’에서 변형되었다.그런데 내 모든 관절은 하자가 심하다. 발목, 무릎, 좌골과 고관절, 어깨 그리고 손목까지… 한동안 심한 불균형으로 각종 통증에 시달려왔다.몸이 틀어질 때마다 내 정신과 영혼도 틀어지고 상처 입는다. 하지만 늘 후자는 무심하게 간과해왔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댄서라는 이들의 상태가 진배 다름없다. 이젠 시간을 투자해서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가능하다면 할 수 있을 때까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몸의 작은 변화와 함께 정신적인 무엇인가 미미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좀 유쾌한 반응들이다. 문득, “이런 반응이 계속되면 굳이 산티아고를 직접 갈 필요가 있을까?”하는 악마같은 생각도 했다. 이런 변덕을 스스로 잘 알아서인지 난 이미 이 걷기 예행연습을 진행하기 전에 왕복 항공권을 구매해놨다. 그것도 환불할 수 없는 것으로.

100여 일의 “걸어 다니자!!!” 프로젝트를 끝내고, 2018년 1월9일 드디어, 난 산티아고로 순례길을 떠났다. 불과 10개월 전 처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수개월 머리에 맴도는 유혹을 나름의 실행으로 옮기기까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시간이 지나갔다. 낯선 곳을 홀로 여행한다는 것은 설레기도 하지만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 남부 쌩장삐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를 출발해서 800여 km 떨어진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약 30여 일을 매일 25km를 걸어서 도착하게 된다. 걷는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 되는 이번 계획은 지난 10개월 동안 내 영혼을 잠식해 들어왔고 지금까지 내 가슴을 떠나지 않고 있는 유일한 설렘이었다. 내가 안무를 시작한, 거의 처녀작에 가까운 『시인의 죽음』을 만들 때 느꼈던 내 영혼과의 교감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전해주고 있었다. 다시 나를 부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젠 현실이라는 변명으로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으련다. 나의 시간과 공간은 바로 내가 걷고 있는 길 위에 있을 뿐이다.

마침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자욱한 안개를 가르며, 첫 여정이 시작되었다. 노란색 가리비 조개껍데기와 화살표가 나를 인도할 유일한 표지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긴장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한 발 한 발 예행연습을 한 것처럼 호흡에 집중하였다. 스페인을 경계로 걸쳐있는 멀리 보였던 피레네 산으로 점점 진입하면서 너무도 아름답고 그림같은 풍경이 내 호흡을 흐트러뜨리며 시선까지 여기저기 빼앗고 있었다. 언덕 위의 목초지, 그림같은 집들, 한가한 양떼들, 세차게 흐르는 계곡수, 순례자들을 안내해주는 좁다란 길들, 봉우리가 하얀 눈으로 덮인 설원,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앞으로 걸으면 걸을수록 난 나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자평을 하면서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잠시, 난 이 첫 여정이 언제 끝날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4시간을 걸은 다음,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해결하고 싶었다. 이미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추적추적 굵은 비로 바뀌었고 우비를 입고 걸은 탓에 안팎으로 완전히 땀과 비가 뒤범벅이 되어 개천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었다. 쉬지 않고 걸어서 몸은 뜨거워졌지만 잠시만 지체하면 온 몸이 젖은 탓에 체온이 하강하였다. 30분 만에 점심을 해결하고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발 1,400m 피레네 산의 정상은 적설과 악천후로 통제되어 우회길로 가야 하지만 거기도 약 1,000m쯤 되어 길은 계속 오르고 오르는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비교적 완만했던 초입에 비해 협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날의 목표지점은 약 900m 고지에 있는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5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본 순간 난 끝이 보이는 것 같아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악몽은 그때부터였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눈으로 바뀌었고 길도 질퍽이는 땅이 기본이고 산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갔지만 나를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 이후였다.
갈림길에서 노란 화살표를 찾아 협곡에 들어섰는데 럿셀(선행자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구세주처럼 나타난 산악동호회 리더로 있다는 한국 중년 아줌마가 길을 인도했다. 하지만 길을 들어서자마자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 겁이 덜컹 났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줌마 뒤를 졸졸 따라가는 나로서는 티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걷기예행연습까지 한 이유는 인대가 헐거워진 오른 발목 때문이었다. 행여나 걷다가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8시간 가까이 걷고 있던 차로 모든 근육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무심코 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산악 아줌마는 나에게 근육이완제 약을 권했다. 난 거부했다. 견디겠다고 말하자마자 지금 먹어야 한다고 강권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약을 받아먹었다. 이럴 땐 전문가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확신이 섰다. 이렇게 한계령을 넘는 기분으로 겨우 첫 알베르게(순례자을 위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난 주저앉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겁먹은 내 몸은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