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인쇄
2018년 7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7월호 통권 509호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아트뷰

 

순수예술 전문지를 만든다는 것
- 월간(月刊) 춤 잡지를 소개합니다




조은경(曺恩慶)(본지 주간)

한국이 무용문화 선진국인 이유
한국은 ‘무용’에 있어서만은 세계적인 문화 선진국이라고 생각한다. 86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 2002 한일월드컵에 이어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전 세계에 생중계 되는 모든 국제경기의 개·폐회식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한국 무용가들의 ‘춤’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또 월간춤과 같은 무용전문지가 42년째 발행되고 있다는 것도 우리가 무용선진국인 이유로 충분하다. 전 세계에서 무용 전문지가 매월 발행되는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정도다. 일본도 월간 무용전문지를 볼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문화선진국이라 할지라도 이토록 무용 전문지가 드문 이유가 있다. 대체로 잡지는 만드는 비용이 일반 책보다 몇 배가 더 들지만 정가는 반도 안 되게 책정되고, 혹은 무료로까지 제공된다. 게다가 또 매달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협찬을 받아야 한다. 광고가 그것인데 다양한 광고가 붙는 일반 여성잡지들에 비해 「춤」같은 이른바 순수예술전문지들은 대중성이 부족하여 책 판매수입을 기대할 수 없고 또한 광고를 해줄만한 주위 관련 산업도 드물다. 무용지의 경우 광고주로 무대의상이나 토슈즈 가게 정도를 기대할 수 있다. 어느 나라나 그런 어려운 처지인데도 우리나라는 현재 월간 무용전문지가 4종이나 발행되고 있다. 또한 국가에서 무용 전문지들에 하나같이 지원금을 주는 사례 역시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렇게 한국을 ‘무용’선진국으로 만든 데는 첫째, 우리 무용가들의 노력도 뛰어났으며 둘째, 월간 「춤」 잡지의 역할도 컸다.

월간 「춤」 잡지가 선정된 이유
금년 3월15일부터 4일간 독일에서 개최된 2018 라이프치히 국제도서전에서 한국관 주제는 작년 ‘한국음악’에 이어 금년은 ‘한국의 춤’이었다. 여기에 잡지로는 영광스럽게 「월간 춤」이 선정되어 춤 창간호, 300호, 500호, 기념책자 등이 전시 소개되었다.
「춤」은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전문지이자 매월 발행되는 월간(月刊) 무용평론지로 지난해 10월 500호를 발행했다. 1976년 3월호로 창간되어 42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총 500번 출판된 것이니 생각해도 숨이 차긴 하다. 500호 기념행사는 주위 민폐를 끼칠 것 같아 대신 「춤」지 창간 때부터 연재되었던 화가들의 글과 그림을 담은 이색칼럼 「춤이있는풍경」 500점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화가 외에 유명 문인들과 무용가들 - 천경자, 백남준, 전혜린, 박목월, 육완순, 문훈숙, 박명숙 등 - 의 글과 그림도 찾아볼 수 있고, 「춤」지의 오랜 편집방식 그대로 세로쓰기, 오른쪽 넘김 등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으나 한편 아취있는 기념책이 되었다.
현재 국내에서 발행되는 잡지는 5,000종이 넘는다. 그중에서 40년 넘게, 500호 이상 발행된 잡지는 지금까지 총 82종. 이 잡지들은 여의도에 있는 잡지정보관(한국잡지협회)의 명예의전당에 전시되어 있다. 1906년 창간한 「경향잡지」가 최고령으로 이는 천주교 종교 잡지라 가능했고, 2013년 700호를 돌파한 「현대문학」을 비롯 「샘터」 「공간」 「주부생활」 「월간 산」 등이 그들이다. 대체로 큰 기업에서 후원하며 운영하는 잡지들이지만 작년에 폐간 한 「작가세계」를 보았을 때 기업이 운영한다고 다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번 국제도서전에 「춤」지가 선정된 것은 42년 동안 꾸준히 쌓아올린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라 여기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춤의 탄생
월간 「춤」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76년 조동화 선생이 창간했다. 「춤」 잡지는 「춤」, 「춤지」로 불리지만 문화계에선 ‘조동화 선생’과 이음동어(異音同語 다른음 같은 뜻)로 쓰인다. 조동화 선생은 서울대 약대생이었던 1947년 어느 날,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평론가 문철민 씨가 운영하는 「함귀봉무용연구소」에서 붙인 ‘대학생 무용 연구생 모집’ 광고를 보았다. ‘앗, 무용과 대학생이 연결’된다는 놀라움에 연습생으로 참여하면서 무용과 첫 인연을 맺는다. 1950년 6·25 한국동란때 서울에 갇힌 무용가들을 정부에서 제공하는 마지막 피난열차에 태우기 위해 조동화 선생은 ‘한국무용단’이란 이름의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단을 창단했고 대표를 맡아 협상하고 송범, 김진걸 등 무용가 10여 명을 대구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54년부터는 각 신문에 16년간 독보적인 무용 평을 연재하였으며(당시의 평은 지금 「춤」지에 연재중) 동아방송 편성부장 재직 시에는 한국 최초이자 대표적인 무용제인 ‘동아무용콩쿠르’를 창설하였다.

「춤지」의 탄생
1976년 3월, 조동화 선생은 우리 무용문화의 고급화와 정보화, 기록화를 통한 ‘춤의 지성화’와 ‘춤의 대사회적 위상 강화’를 모토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전문지 월간 「춤」 잡지를 창간한다. 당시만 해도 ‘무용’은 무대예술이며 ‘춤’은 비천한 것으로 여겼고 또 문화어가 아니라는 많은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춤’을 제호로 하였다. 이제 우리말 ‘춤’은 문화사적인 동시에 사랑스러운 용어로 자리매김 하였다. 또한 「춤」은 이어령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건의하여 ‘연극의해’ 다음 1992년을 ‘춤의 해’로 지정되게 하였다. ‘무용’이 아닌 ‘춤’의 해였다.

평론가의 탄생
「춤」지는 각 분야 석학이나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들을 춤평단, 필자로 끌어들여 춤 애호가로 만들면서 춤 예술에 대한 낮았던 사회적 인식을 당당히 예술의 한 장르로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특히 당시 ‘무용평론’이라는 의식이 없었던 때 조동화 선생은 「춤」지를 통해 처음으로 평론가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활동하는 대부분의 무용평론가 정병호, 이순열, 채희완, 김영태, 이종호, 김태원, 김채현, 김경애, 정순영, 김승현, 성기숙, 장광열, 심정민, 이동호, 정기헌, 박민경, 조은경 등은 모두 조동화 선생이 발탁하여 「춤」지를 통해 등단시켰다. 이들은 수십 년간 「춤」에 글을 쓰면서 비평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우리 현대 춤의 태생과 발전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문화운동
‘춤의 선구자 조택원’ 춤비를 세우기 위해 「춤」지는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수 천 무용인들을 한뜻으로 뭉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모금운동을 발화시켰고 드디어 1996년 조택원 춤비를 국립극장 앞마당에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2001년에는 ‘한국 전통춤의 집대성자 한성준’ 춤비를 태평무 전수관에 세운 것은 순수예술 전문지의 힘을 극적이며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뽑힌다.
춤 조동화 선생은 2014년 4월24일 92세의 일기로 작고하셨다.
마지막으로 조동화 선생이 우리에게 항상 당부하던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높은 목청들 속에서 차라리 낮은 음성이 더 잘 들일 수 있고,
높이 나는 것보다 낮게 나르는 것이 또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듯,
국판(菊版) 얄팍한 「춤」이 낮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들려졌을 것이고,
낮게 있었기 때문에 눈에 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결코 즐거움 없이는 못하는 일이다.”


*성남문화재단 발행 「아트뷰」 2018년 6+7월호(통권 139호)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