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인쇄
2018년 7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7월호 통권 509호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미술살롱

 

유럽에 한국 화가의 이름 드높인 백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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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鄭在淑)(미술기자)

이름은 몰라도 그의 그림은 낯익다. 한국 문단의 대표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표지를 장식한 이미지가 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옆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아이가 새가 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소설가가 말하고자 한 우리 현실을 함축한 힘으로 책을 더 빛나게 했다.
그 걸작을 그린 백영수 화백이 지난 달 29일 별세했다. 96세. 2년 전 가을, 개인전에서 만났던 그의 맑은 눈동자가 생각난다. 100세 장수 시대라 해도 현역 화가 백영수의 기억력과 활기는 놀랄 만 했다.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가자 그의 함박웃음이 관람객을 맞았다. 엊그제까지 붓질을 멈추지 않았다는 그는 “화가에게 전시회 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있을까” 웃으면서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짐했다.
고인은 1950년대 한국 최초 추상미술그룹으로 활동한 ‘신사실파(新寫實派)’의 동인이었다. 그와 뜻을 같이 했던 김환기·이중섭·유영국·장욱진이 일찌감치 타계한 뒤 그는 유일하게 남은 증언자로 그 시대를 기억했다. 동인 화가들을 일일이 추억하며 당시 “운이 좋아서 혼자 살아남았다”면서도 “작품 더 많이 하게 백 살까지 살게 해 주세요” 소원했다.
백영수 화백은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나 2살 때 어머니 손을 잡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미술대학에서 공부했다. 1945년 귀국해 조선대 미술대 교수를 지낸 뒤 척박한 조국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리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100여 회 전시회를 열만큼 유럽에 정착한 1세대 한국인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옛 일을 회상하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서울 와 처음 하숙하던 곳이 이곳 통의동이에요. 1947년 8월 지금은 없어진 화신백화점 4층에서 첫 개인전을 하는데 하숙집 주인이 도시락을 싸줬죠. 그 밥을 먹으며 하루 종일 전시장을 지켰어요. 당시 처음 내 그림을 사 준 이가 고암 이응로 선생이요. 화가가 사줘서 얼마나 신이 나던지.”
쇠약해진 몸인지라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작품 할 때만은 의욕이 넘쳐 그 마지막 개인전에도 포장지 등을 활용해 생기발랄한 콜라주와 드로잉 작품을 선보였다. 선 몇 개로 화면을 팽팽하게 만든 ‘단거리 경주’ ‘해바라기’는 탱탱 소리가 났다.
“내가 평생 화폭에 구현하려 했던 주제는 ‘모성(母性)’입니다. 어머니와 아이는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이라오.”
촉촉해진 음성으로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그림 속 몽상에 잠겨 고개를 갸웃한 아이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한동안 눈을 깜박였다. 그 침묵 속에 담겨있던 수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그가 잠들었다. 하늘에 가서도 그는 영원한 화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