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인쇄
2018년 7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7월호 통권 509호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공연평

 

접촉과 연결, 드러나는 종속의 관계
- 조기숙·김성한




정희창(鄭喜昌)(춤평론)

* 조기숙뉴발레단 조기숙 안무 『접촉 & 연결』(6월5일, 이화여대 삼성홀)
월트 리프먼은 「여론(Public Opinion)」이란 책의 처음에서 이런 일화를 들려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본토에서 떨어진 한 섬에 영국, 프랑스, 독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섬에는 아무런 통신수단도 없었고, 2달에 한 번씩 증기선이 와서 유럽의 소식을 전해 줄 뿐이었다. 다음 번 증기선이 왔을 때 그들은 이미 6주 전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실상은 그들이 6주 전부터 서로 적이었는데 그 기간을 마치 친구처럼 지냈다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부 세계와 접촉하여 연결되는 우리의 의식이 서로 일치되지 않고 단절되고 조화를 이루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이러한 일화는, 다른 예술과 접촉하여 연결되는 무용예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6월5일 화요일 오후8시 이화여자대학교 삼성홀에서 있은 조기숙뉴발레단의 『Contact & Connection(접촉 & 연결)』 공연에 대하여도 그것에서 유추되는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안무자인 조기숙은 일렉트릭 기타 연주와,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단어와, 목소리로 내는 소음, 하나의 문장을 무용예술에 대한 자극제 혹은 촉매제 혹은 동행자로 설정하여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먼저 객석 통로에서 일렉트릭 기타가 「파헬벨의 카논」을 연주하며 무대로 오르는 것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그리고 곧이어 나타나서 그와 마주보는 무용수가 한 동안 기타와 교감을 나누는 듯, 대립하는 듯, 끌려가는 듯, 조종당하는 듯하면서 한 무대에 서 있다가, 다음에는 막이 조금 올라가서 막에 가려 다리만 보이는 무용수가 기타가 내는 갖가지 소리 혹은 기타가 내는 화음이나 짧은 선율에 맞춰 움직이는 것으로 악기와 춤의 접촉과 연결을 나타내고 있다.
한 명의 무용수를 따라 나머지 세 명의 무용수가 움직이다가, 앞서는 무용수가 뒤를 돌아보면서 뒤의 무용수들의 정체를 파악하자 그들이 그림자처럼 스러지는 장면 다음으로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단어와의 접촉과 연결이 시도된다.
앞에 섰던 한 명의 무용수가 무대 앞에 앉아 마이크를 쥐고서 머리, 어깨, 무릎, 발을 외치면 무대 위의 나머지 무용수들이 그 신체 부위를 강조한 춤을 즉흥으로 추는 것이 접촉과 연결의 방법이다.
마침내는 관객석 앞을 걸어다니며 관객에게도 신체 부위를 부르도록 하는데 머리, 장딴지, 엉덩이 등 크게 벗어나는 신체부위가 없다. 다만 한국무용을 전공한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이성희 사무국장은 내밀어진 마이크 앞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한 사람답게 ‘손목’이라고 부른다.
공연 후 손목이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무대 위의 무용수들이 춘 춤에 만족스러웠느냐고 묻자, 그들의 움직임은 예상가능한 것이었다고 한다. 손목을 강조할 때 흔히들 움직이게 되는 동작일 뿐이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 한국무용에서의 손목의 선에서 흘러내리는 우아함이 현대무용의 즉흥에서는 나타나지 못하였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이제 보컬이 등장한다. 입으로 내는 소리는 음악에서 신과 소통하기 위하여 내는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다. 소리지르는 ‘꽥’, 바람을 내뿜는 ‘푸’, 위협적인 ‘크’, 가성으로 올리는 ‘우’ 등의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소리에 무용수들이 반응하여 움직인다. 뒷부분으로 가면서 보컬리스트 양쪽 편으로 각각 무용수를 두고 한 쪽은 위협을 하는 소리를 내는 반면, 다른 쪽에는 재즈의 스캣(scat)을 하듯이 부르는 것이 그나마 가장 선율적인 소리이다.
앞서서 무대 앞을 한 바퀴 빙 돌아 오른쪽 뒤로 가서 어둠 속에 숨듯이 선 사진사가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듯 사진기의 큰 눈을 들이대고 찍고 있다. 그러나 작품은 사진사의 행동은 춤과 목소리의 양태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무용수들에게는 또 짧은 문장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시 분해되고 순서가 섞이어서 주어진다. 무용수들은 마치 ‘토끼는 춤추고 여우는 바이올린’ 하듯이 그 문장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고 몸을 뒤튼다.
춤추는 무용수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듯한 보컬을 쫓아내는 것은 일반인 무용단의 일단이다. 잠시 후 그들은 무용전공자들의 무용수와 섞이고 헬륨 든 풍선을 어깨에 매달아 올린 두 무용수에 의해 좁다란 도형으로 내 몰렸다가 다시 해방되어 함께 춤을 춘다.
마지막 무대는 왼쪽 뒤에 기타리스트가 서 있고 보컬리스트가 무대를 빙빙 감싸듯이 돌아다니게 하여 두고서, 그들의 소리에 따라 때로 획일적인 군무를 추는 무용수들의 무대이다. 이들의 모습에서 서로 다른 장르 사이에 오가는 진정한 교감은 없어 보인다. 잠시 보컬리스트가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를 돌며 뛰어다닌 것이 교감의 전부일 뿐이다. 금세 악기의 음률과 목소리는 춤과 다시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돌아간다.
접촉과 연결은 진정하고 대등한 교감과 속내 깊은 상호작용을 낳기보다는 종종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낳는다. ‘접촉하지 않는 신에는 탈이 없다(觸らぬ神にたたりなし)’는 일본 속담처럼 접촉하여 관계를 갖는 것은 때로 위험할 수도 있다. 접촉하여 연결되는 것은 때로 상호간의 교감과 상승과 고양을 낳기 보다는 그들을 흔히 지배와 종속의 관계 속에 빠뜨린다.
안무자가 보여주는 것은, 춤예술 바깥의 다른 예술이 마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외부 세계처럼 춤예술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가 춤에 메시지를 전하여 주면 춤은 그것에 뒤늦은 반응을 보이는 그런 관계이다. 춤의 세계가 바깥 세계와 함께 가거나 앞서 가는 일이 좀처럼 없다.
안무자는 이러한 것 자체를 표현하고자 했을 수도 있고, 나아가 그러한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춤예술이 일반인들에게 확산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하고 시도해 보려고 하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드러나 보여진 것은, 무대 위에서 춤이 음악이나 언어나 목소리나 문장과 제대로 접촉하지 않고 제대로 연결되지 않을 때, 춤예술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이고, 그들에 종속적일 수 있으며, 그들과 진정하게 교감하는 관계를 갖기 힘든 것인가 하는 그늘 속에 있는 춤예술의 속성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랬다고 하더라도 일반인 무용단의 7명과 무용수 8명 그리고 기타와 보컬과 안무자, 그리고 그들과 한 부분씩이라도 공감을 나눌 수 있었을 관객이 이 시간 이 장소에서의 공연으로 즐거웠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것이 춤이다.

* 세컨드네이처댄스컴퍼니 김성한 안무 『40712』(6월8~9일, 강동아트센터 소극장드림)
세컨드네이처댄스컴퍼니는 이 시대의 무거운 주제들을 세계 유명 작가들의 여러 가지 문학적인 업적에 기반을 두고 다양한 안무작업으로 무대에 올리는 실험을 계속해 오고 있다. 6월 8일 오후8시와 9일 오후4시 강동아트센터 소극장드림 무대에 올린 『40712』도 앞으로도 계속될 이러한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40712를 정수로 파악하여 본다면, 우선 그것은 짝수이므로 소수가 아니다. 40712의 약수는 1, 2, 4, 7, 8, 14, 28, 56, 727, 1454, 2908, 5089, 5816, 10178, 20356, 40712 이고, 이들 약수 가운데 자신을 뺀 수를 합하면 46648로(aliquot sum이라고 한다), 자신보다 그 합이 커서 ‘과잉수’라고 부른다.
게오르그 뷔휘너의 희곡 「보이체크」를 바탕으로 한 전작 『보이체크』를 개작한 작품인 『40712』는 그 제목에 관하여, “40712 숫자는 보이체크 작품 속에 보이체크의 생애이다. 40년 7개월 12일”라고 설명하여, 원작 희곡에서 나오는 보이체크의 나이를 연월일 순으로 월은 1자리로 표시하여 40712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어로 씌어진 원작의 군대막사(Kaserne) 장면에서 보이체크(Woyzeck)는, “나는 오늘 30년 7개월 12일의 나이를 먹었지.(Ich bin heut alt 30 Jahr, 7 Monat und 12 Tage.)”라고 하여, 자신이 만 30세 7개월 12일이라고 하고 있다.
한편 원작의 모델이 되었던 실존인물 보이체크가 돈을 벌기 위해 약물 실험대상이 되었다가 원작에서처럼 연인을 의심하여 살해하는 나이는 만 41년 5개월쯤이 되고, 처형당하는 나이는 만 44년 7개월 24일쯤이 된다.
모든 작품은 그 작품을 만들 때의 처음 의도가 어떠하였든, 그리고 처음에 어떤 착오나 어떤 실수가 개재되었건 일단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되면 그 작품은 그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아나가게 된다. 역시 제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40712는 일단 작품의 제목으로 세상에 나온 이상, 그 고유한 작품 이름의 숫자로서의 생을 가지게 된다.
안무자 김성한의 이번 작품은 원작에 바탕을 두었으되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관점에서의 관찰을 시도한 결과물로 보인다.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세 인물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까지 보일 정도로 가장 활약을 펼치는 것은 보스, 즉 보이체크의 상사이다. 작품에서 보스는 냉소적인 미소를 띠고서 나머지 사람들을 휘어잡고 조종하는 지배적인 인물이다.
원작에서 보이체크의 상사인 중대장(Hauptmann)의 대사 가운데 한 부분은, 보이체크를 앞에 두고 그를 지칭하며, “녀석, 그는, 그는 머리에 총알 몇 개를 박아넣고 싶은 건가? 그는 자기 눈으로 나를 죽이려는 군. 나는 그를 위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그는 좋은 사람이지, 보이체크, 좋은 사람.(Kerl, will Er - will Er ein paar Kugeln vor den Kopf haben? Er ersticht mich mit seinen Augen, und ich mein’ es gut mit Ihm, weil. Er ein guter Mensch ist, Woyzeck, ein guter Mensch.)”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행사하려드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작품에서의 중대장은 처음 부분 무대 왼쪽 편에서 어두워 가는 조명 속에서 유독 인상적인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나머지 모든 대원들의 행동을 간섭하고 이끌다가, 끝으로 가면서는 화려한 브레이크 댄스도 펼치면서, 무대인사에 이르러서도 주도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중대장의 활약상으로 인하여 이번 『40712』 작품은 사회적 환경에 지배당하는 보이체크와 같은 사람들의 암울한 처지를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압제하는 이의 활력과 그것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에 반해 정작 보이체크의 주된 역할은 약물중독자인 것으로 보여진다. 무대 오른편 위쪽에 놓여진 것으로 그려진 병상에서, 비록 처음에는 강제로 혹은 반강제로 약물을 투여 받게 되었는지 모르나, 그는 그런 식의 약물중독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원작에서도 그는 의사와의 계약에 따라 돈을 받고 실험약물을 투여받으며, 결국 사건을 저지르기 전에 의사에게 몸이 떨린다고 호소하고 앞이 캄캄해진다고 호소한다. 무대는 보이체크의 그러한 상황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한 무대 오른편 뒤에서 앞으로 가로로 쳐진 철봉을 타고 내려오는 두 번의 연기에서, 무대는 그다지 처절한 느낌이라든가 곡예를 하는 듯한 아슬함이라든가 혹은 무언가 강렬한 것이 있을 듯한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마지막에 무용수가 철봉에서 떨어져 내릴 때, 물론 안전장치를 하여 실제 다치게 되면 안 되는 것이지만, 그가 떨어져서 실제로 다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의 어떠한 절박함이나 아찔함을 전달하는 구성이 있었다면 오히려 메시지 전달을 명확히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주된 역할을 맡은 것은 실제 사건에서나 원작에서나 이를 무대에 올린 어느 작품들에서나 희생자를 담당하는 보이체크의 연인역이다. 특히 무용 무대는 어떤 개념이나 이념이나 이야기나 사건을 형상화하여 일종의 제식을 하는 것이라면, 무대에서의 희생자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항상 무언가 제식이 목적하는 바를 위한 희생양으로서 작동하게 된다.
하지만 『40712』에서의 희생자인 보이체크의 연인은 무엇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말의 탈과 토끼의 탈과 다른 동물들의 탈을 쓴 무용수들의 연기에서도 그것이 일순간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에쿠우스(Equus)」를 차용하여 온 것인가 혹은 조오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농장(Animal Farm)」의 주제를 함께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고 여겨질 뿐 그러한 장면들이 작품 전체가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를 향하여 초점을 맞추어가는 응집력은 부족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모두 보스이자 상사이자 중대장인 지배권력에 휘둘리고 동조하고 그러는 사이 틈틈이 그들만의 즐거움도 있고 갈등도 있고 다툼도 있는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모습으로만 그려지고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안주하는 무대 혹은 안주하는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숫자 뒤에 숨은 타이틀이자 주인공인 보이체크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만을 나락에 빠뜨릴 뿐 누구도 해치지 아니한다. 뷔히너가 희곡의 끝을 맺지 못하였기에 연출가마다 다양한 결말을 짓고 있는 원작 「보이체크」를 춤의 무대로 형상화하는 이 작품은, 나름대로 은연중에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보이체크의 그러한 심성과 행위에 대하여 일종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몸짓으로 무대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무용무대는 직설적일 수도 있고 은유적일 수도 있고 반어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용수들의 움직임의 에너지가 전달하는 긍적적이고 밝은 측면과 본 무대와 공연 후 무대 인사를 따로 구분지을 수 없는 연속에 선 무대 인사의 즐거운 모습들을 생각할 때, 이번 무대는 타인에게 두르는 폭력과 압제의 부정적인 형태를 오히려 너무나 밝은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춤의 무대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춤이란 삶의 예술이고 그 근저에 있어서부터 삶의 즐거움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예술이란 점이다. 추구해오는 깊이가 있으면서도 이와 같은 춤예술의 장점을 아낌 없이 보여줄 세컨드네이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