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인쇄
2018년 7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7월호 통권 509호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춤 스크랩북

 

나의 작은 동냥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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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동 화()

꼭 이것이어야 한다는 전공(專攻)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거나 고민해야 할 필요 없이 그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희희낙락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반생(半生)을 살았다. 세상의 일은 모두 타인의 영역(領域)이고 거기에 목숨을 건 전문가가 있으니까 내가 뒤지고, 그래서 그것에 진(敗)다고 하더라도 별 부끄럼 없이 마음 편하게 지냈다. 그러니까 그쪽에서 나를 싫다면 나는 그 자리를 비켜 다른 곳을 찾아 나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남의 영토에서 끝까지 맞서야 할 명분도 또 그럴 뜻도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필요로 한대도 머뭇거릴 판인데 싫다고 하는 데야 내가 왜 매달려... 하는 생각. 그래서 직장도 여러 곳을 옮겨 다녔고… 갈 데도 오라는 데도 많았다.
원체 나는 가지고 나온 동냥주머니가 누구의 것보다 작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베품을 받아도 그 작은 주머니가 늘 넘쳤다. 때문에 흡족하고 감사한 마음이 될 수 있었다. 사실 이렇다 할 재주가 없이 태어났는데 동냥주머니가 컸다면 얼마나 힘겨운 인생을 살아야 했을까―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가 있다.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남의 것. 큰 주머니가 채워질 리는 없을 테고…. 그러니까 늘 충족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13년간 몸을 담아온 회사에서 어느 토요일 오후 갑자기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그 직장이 갑자기 나를 싫다는 것이다. 우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같이 밀려나는 백여 명의 동료들은 모두 승복할 수 없다고 법정투쟁에 나섰다. 허나 나만 ‘유쾌하게 떠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어디든지 기댈 데 없는 혼자였다. 담담하였으나 외롭고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날아갈 곳이 없는 50고개를 넘은 늙은 날개.
저녁 늦게까지 내가 쓰던 책상 서랍과 캐비넷을 정리하여 버릴 것과 챙길 것을 골라 큰 보따리 셋을 만들었다. 그러나 차마 내가 그것을 들고 계단을 내릴 수는 없어 사환에게 시켜 집으로 보내고는 마치 퇴근하는 모습으로 회사 현관을 나섰다.
― 가슴이 이상하였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는데 왠지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나는 벌써 이렇게 용기를 잃고 있는가―이런 꼴을 보이다니….
그렇지만 이곳이 나의 마지막 직장이기를 바랐던 미진함 때문에 더 억누를 힘은 갖고 있지 못했다.
당장 월요일 아침부터 내 집 앞에 차가 오지 않는다. 내가 아침 그 시간 집에 그대로 앉아 있게 되면 식구들이 얼마나 불안할까… 하는 생각이 실직(失職) 그 자체의 외로움보다 더 참기 힘들었다. 반생 봉급쟁이로 살아온 나의 생활리듬―가장(家長)의 출근으로부터 시작되는 내 가정의 하루 일과의 붕괴가 나에겐 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돼버린 일, 잊어버리자. 하룻밤 자고 내일, 앞의 일이나 생각하자.
그런데 그날 밤 늦게 뜻하지 않게 한 후배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것은 내가 오늘 회사에서 밀려난 사실을 어떻게 알고 하는 위로의 전화였다. 그러면서 월요일부터 자기 회사로 나와 줄 수 없겠느냐―는 너무도 의외의 이야기였다. 이 예기치 못했던 구원의 손길. 나는 실직과 득직(得職)의 그날 밤의 심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회사로 나가 보면서 안 일이지만 그곳은 나 같은 사람을 필요하는 곳은 아니었다. 더구나 월요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당장 내일 일요일 회사로 나와서 자리를 확인하고 월요일부터는 정상출근하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까지―모두 그의 계산된 호의였다.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법에 이렇게 하는 법도 있구나―나도 언제쯤 이렇게 베풀면서 살 때가 있을까, 그러나 이미 늦었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서 내가 별 할 일 없는 직장, 송구스럽기 한량없는 그의 회사로 매일 출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일들, 그리고 용서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을 생각해볼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일이란 것에만 매달려 인생이란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언제든 나에게 이런 시기가 온다는 것에 나는 너무 등한했었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하는 일을 생각하자. 그러나 그런 일이라면 우선 돈이 있어야 했다. 허나 나에게 그런 돈이 어디 있는가. 나의 신용만으로 대체 얼마나 빌려질 수 있을까. 더구나 지금까지 나는 개인주의로만 살지 않았는가. 어느 친구가 나에게 그런 돈을 빌려 줄 것인가. 절망적이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게 생각했던 것은 얼마나 헛된 망상이었나를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불면증은 시작된다. 항상 부족했던 잠, 늘 짧던 밤이 갑자기 긴 밤으로―그리고 무서운 밤으로 변한다. 이 막막했던 대목은 줄이자. 다행히 이때 외국인 신부가 경영하는 ‘마인드 컨트롤’ 도장(道場)을 나가 보라는 친구의 권유로―거기서 잠을 청하는 방법을 배운다. 훌륭한 효과였다. 오늘까지 내가 새삼스럽게 숙면(熟眠)의 행복을 음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떻든 나는 다시 적은 것으로도 충족하는 본래의 생각을 되찾는다. 그리고 노후엔 한번 손대보려던 무용에 관한 잡지에 대해 계획을 세웠다. 내가 생각한 나의 ‘노후’는 50대의 그런 나이는 아니었다. 뚜렷하지는 않으나 70대 정도의 그런 늙음이었을 것 같다. 헌데 예기치 않게 그 ‘노후’가 이렇게 빨리 다가선 것이다.
무용은 대학 때 과외로 택한 것이었다. 대학공부는 마냥 재시험, 재재시험으로 모두 D학점, 거기에 유급(留級)까지 해야 했는데도 이런 과외활동 때문에 그 시절은 그저 즐겁고 낭만이 있었다. 그 당시 무용 주변에 나 같은 약학도(藥學徒) 말고도 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학과의 괴짜 대학생들이 제법 많을 때였다. 특히 예쁘고 매력있는 문과 여대생들과의 어울림 같은 것이 좋았고 거기서 내 인생의 부족한 많은 부분이 채워졌다.
해서 무용에는 나의 젊음과 향수가 있었다. 특히 비참하게 된 나에게… 어떻든 『춤』誌(지)를 구상해낸 연유는 대강 이러했다. 그런데 세상사는 참으로 이상하다. 도움은 항상 받는 사람에게만 받게 된다는 사실. 내가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는데 도움을 받던 이에겐 자꾸만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 나는 언제나 나에게 도움을 주는 분에게로 또 찾아갔다. 그리고 나의 뜻을 밝혔다. 그분은 의외로 쉽게 응해주셨다. 만일 내가 그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고 하여 갔었더라면 그는 결코 응해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그런 기능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었으니까.
어떻든 이렇게 해서 시작한 월간지가 이제는 백호(百號)를 넘었다.
열 권 만 낼 수 있었으면 했는데 너무 많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성취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의 전공은 역시 춤은 아니다. 그래서 여기 이 세계에서도 나를 싫다면 옛날처럼 주섬주섬 싸들고 어디 다른 곳으로 찾아 떠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새이웃 1985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