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인쇄
2018년 7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7월호 통권 509호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춤 스크랩북

 

두 고향 이야기
- 조 동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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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 보낼 우리 예술단의 예행연습을 보고 나는 너무도 실망이었다.
‘예술단’이라고 했으면서 코미디언 남보원의 기차소리, 서투른 함경도 사투리 흉내에, 한물간 유행가수며 질 낮은 부채춤 같은 프로그램 등… 그것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꼭 그런 종목이어야 했다면 이미 극복된 오늘의 수준의 것들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헌데 막상 저쪽 평양예술단이라는 것들을 보니까 우리의 것과 비교 안 될 정도로 낮고 단순한 것이어서 나의 그런 속상함이 아주 소용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과 북한예술의 차이는 서울과 변두리의 어느 읍(邑)의 문화의 차이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평양’이라는 호기심이 아니라면 그 예술단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대체 몇 사람이나 구경해주며 박수칠까. 우리의 TV를 보는 시청자 눈으로는 도저히 그 흥행이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처음부터 그쪽 예술이란 것이 대개 그런 것이려니 짐작했으나 정작 그 상상보다 더 낮은 몰골들, 그래서 이상한 승리감 같은, 그러면서 적막함도 더불어 느꼈다.
그래서 이것을 본 솔직한 인상들이 신문이나 방송에 나와서 보는 눈이 같음을 알게 됐는데, 어느 저명한 교수는 이런 우리의 ‘승리’ 분위기에 대해 “콩쿨도 아닌데 좋다 글타하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형답게 하자…”고 하였다. 당연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 말은 핀잔에 속하는 말도 되기 때문에 나는 그 교수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만은 않는다.
적어도 40년 갈라져 살아온 그쪽 예술이면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다. 불가분의 우리 모두와 상관있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첫인상을 ‘틀렸다’ ‘못했다’―는 식으로 지적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마치 상봉가족들이 ‘늙었다’ ‘굶주렸다’―는 인상소감이 틀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콩쿨이 아니다’―는 이런 애증(愛憎)의 말이 있고 난 다음 단계일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그 교수에게 첫인상을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콩쿨이 아니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물음이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정답이 될 수 없어서이다.
특히 나는 남북한을 비교하는 경우에 늘 이런 ‘교양’과 ‘인상’의 순서에서 고독을 느낄 때가 있다.
싱가포르던가 자카르타였던가 그 장소는 뚜렷하지 않으나 몇 해 전 우리 축구팀과 북한팀이 대결하는 TV 중계가 밤 자정을 넘은 시간부터 방영되었는데 나는 자지 않고 응원―결국 우리가 승리했고 그 바람에 흥분하여 꼬박 한밤을 샌 일이 있었다.
다음날 L교수와 차를 나누면서 간밤의 흥분을 신나게 털어놓게 되었다. 스포츠란―‘향토정신이 바탕이 되고’ ‘애향심이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그 연장선상에서 열광하고’ ‘그런데 나는 이북 출신이니까 당연히 북한팀을 응원했어야 옳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등등의 이야기.
그런데 남한 출신의 L교수는 갑자기 엄숙해지면서 자기도 TV 축구를 끝까지 지켜보았지만 남한도 북한도 응원할 수 없었다는 것. 그러면서 왜들 우리가 그 게임에 대해 그렇게 흥분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어느 쪽이 이기면 어떠냐 ‘모두 같은 민족인데’―자기는 그저 민족분단의 비애를 느꼈다는 식이었다.
이렇게 나오면 나는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내 생각으로는 L교수가 먼저 향토애 같은 원시감정을 실토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 연후에 민족분단의 슬픔을 말해도 늦지 않는다. 뭔가 위선의 그림자를 느끼게 하는 교양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대화를 멈추게 한 원인이었다.
나는 우리 집 아이들과의 대화에서도 이런 고독을 느낄 때가 있다.
북한에 대한 나의 이야기에 대해 우리 아이들은 으레 그것을 정부의 PR 정도로밖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평양예술단의 공연 모습을 실황중계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북 어린이들이 한국 어린이는 가난해서 모두 깡통을 차고 굶주린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듯 말이다.
어떻든 아버지의 말이 이 정도 대접을 받게 되면 나는 과격한 팔레스타인인이 된다.
이북에 집과 땅과 혈육 친척을 두고 온 월남 실향민인 내가 이남 출신의 교수나 서울서 태어난 내 아이들보다 이북을 더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해도 내가 더 할 것이지 너희들과 비교할거냐―식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과의 대화마저도 끊기면 나는 팔레스타인 전사(戰士)처럼 그쪽 편을 향해 무조건 기총소사를 한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너희 같은 놈들 모두 잡아다가 낙하산에 태워 북한 땅에 떨어뜨리고 말 것이다. 대한민국은 우익(右翼)이 세운 나라고 6·25 남침도 우익이 지켰어…’가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으레 ‘우익’이란 말을 쓴다. 이 낡은 개념의 단어는 물론 우리 아이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하나 나는 이 말에 향수가 있고 자기 확인 같은 것이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같은 민족끼리 이런 생각을 하면 못쓰는데―하면서도 북한 외교관이 밀수를 하여 그 나라에서 쫓겨난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상한 쾌감과 승리감을 맛본다.
‘동족의 수치’는 그 다음의 문제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한마디로 북한은 우리의 첫 번째 적(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북한이 외국과 스포츠로서 이기는 것이 싫다. 일본팀과 싸워 이겼을 때도 나는 한참 고민한 끝에 대의명분상 북한 승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의 승리와 방자함이 우리의 휴전선과 남파 간첩과 상관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언제나 어디서나 패하고 혼났으면 하는 것이 벌거벗은 이불 속에서의 나의 양심선언이다. 그렇지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민족감상주의는 내게 반문할 테지.
아웅산 묘지 폭파는 북한이었지 일본은 아니잖는가.
그래도 나는 늘 북한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어느 하루도 사랑하는 그곳, 그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의 누이동생이 이북에 그냥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 고향방문단에 끼워 주십사고 신청했었는데 평양이 고향인 사람만 쉰 명 가게 된다고 나는 빠져버렸다.
그러나 서로 오래만 살면 만날 날이 있겠지.
3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북에 두고 온 딸을 만나기 위해 오래 살아야지―그래서 만나야지―하여 늘 하나님께 기도하셨는데 정작 90세가 넘으시니까 왜 자기가 오래 사셔야 하는지 그것마저도 모르시는 어린아이처럼 되어 가셨다. 그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동생을 만나야 할 이유라면 어머니의 소망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런 연대의무 같은 것일 것이다. 이런 내역은 모두 어머니 묘비문에 새겨져 있다.
‘회령에 두고 온 둘째딸 금옥이 때문에 언제나 남북이 열릴 날을 기다렸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가시다.’
나는 이 비문을 사진을 만들어 전달하려고 한다.

샘터 1985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