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7일 인쇄
2018년 8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8월호 통권 510호 |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춤 스크랩북

 

죽음과 마주쳤을 때만 고귀하고 선명한 생명의식
- 冥想(명상)에세이 / 생명에 대하여



조 동 화
(월간춤 발행인)

죽음의 슬픔을 제일 처음 경험한 것은 어린 강아지의 주검에서였다.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나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나는 죽은 강아지 몸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며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후 어린 동생의 죽음은 보통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는데 그때의 슬픔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동생은 이미 죽어서 끝나버린 일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고 하나님한테 간절히 기도했었다. 삼촌들이 그 애를 공동묘지로 옮겨가는 그 시간까지. 그러나 그는 소생하지 않았다.
30대 초 나는 심한 빈혈증으로 오랫동안 입원하고 있었다. 골수의 기능이 좋지 않아, 만들어지는 혈구가 시원치 않아서라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혈구의 수가 줄어서 결국 절망에 가까운 지경 속에서 살았다.
병의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 살지 못하고 가는 그런 억울함이 나를 더 괴롭혔다. 못다 산 남은 세월을 귀신으로라도 되살아나 세상사를 목격해야 될 것처럼 살고 싶었다.
나 자신에 대한 기대나 약속 때문에 여기서 쉽게 단념할 수가 없었다. 단념이 안 되는 것은 정말 괴로웠다. 그러나 목숨은 자꾸 쇠진해 갔다. 그래서 차라리 단념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어버리면 편할 것이라는 사고의 혼란 속에서 지내기도 했다.
찾아온 이들의 기도나, 하나님 그분은 나의 이런 공허함을 절대 메꿔주지 못했다.― 고 그때의 나의 일기에는 적혀있다. 통틀어 인생 그것의 허무함, 그런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치근함과 죄송함은 끝끝내 속죄되지 않았다.
임종의 증세라고 느껴지는 높은 열이 갑자기 몰려왔다. 가족과 의사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죽는 거다’고 혼자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겨우 이것밖에 살지 못했구나― 하면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고열이 며칠 간헐적으로 오고가고 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열은 임종의 열이 아니고 말라리아 때문인 것으로 판명됐다. 수혈하는 과정에서 그 핏속에 말라리아균이 있었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말라리아를 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든 그 후 혈구의 수치가 더 떨어지지 않고 최하의 상태로 오래 머물러 있다가 조금씩 조금씩 상승하게 되어 마침내 이른 가을에 입원한 다음해 늦봄에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그런데 죽음의 두려움이 없어진 그때부터 이미 나는 생명의 고마움이나 생명 그것에 대한 의식은 없었다. 사실 생명이란 실체는 죽음이라는 것과 연결시켜 생각할 때만 고귀하고 선명한 것이지 건강이라든지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는 그저 잊혀져 버리는 것일지 모른다. 요즘에 와서 느끼는 일이지만 나 자신은 빨리 늙어버리는 것 같은데, 아직 살아계시는 명인(名人)이나 선배를 보면 그들의 세월은 장구한 것 같고 그들의 시간은 뜻있는 것 같게만 생각된다.
어렸을 때에는 하루가 무진히도 길었다. 어느 지루한 오후의 시간은 아주 멈춰있었던 것 같게 느껴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결혼한 이후의 세월, 자식들이 생겨난 후의 세월은 봄·여름·가을·겨울― 이 창가에 수레그림자 지나가듯 그저 얼른 얼른 지나가버렸다. 혼자 살 때는 그 하루시간을 자기 혼자서만 쓰기 때문에 흡족하였지만 결혼 후는 모든 식구가 그 시간을 같이 써버리기 때문에 빨리 소모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나는 젊어선 늙음이란 것을 생각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나의 생명이 쇠진할지라도 늙음은 없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허나 볕에 빛이 바래듯 전혀 느끼지 않게 하얗게 바래가는 생명의 한계를 어제 오늘 확실히 실감하게 된다. 그것은 눈에, 무릎에 그리고 기억력에 찾아들었다.
아직도 유모어를 잊지 않은 91세의 나의 어머니. 그의 몸무게는 매일 가벼워지고 실뇨(失尿) 횟수가 잦아지는 것은 생명이 마침내 자기가 거느리는 몸 하나를 제대로 관리해나갈 기력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더래도 그 어머니는 앞줄에 서서 아들에게 닥치는 늙음을 막아주시듯 밤낮
“얘, 애비야….”
하고 나의 젊음을 확인케 해주는 한 나는 그래도 그렇지 않은 이에 비해 보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머리가 빨리 하얘져서 나는 30초반부터 염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는 단순히 보기가 흉해서였으나 40 넘어서부터는 그 염색을 집어쳐 버렸다. 구실은 ‘귀찮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늙음을 숨기는 것 같은 것이 싫어서였다. 이것은 하나의 젊음의 오만이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이상하게도 그 염색을 다시 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젊음이 없어진 징조일 게다. 진정 늙기 싫어서일까.

- 고려합섬 사보 「고합」 198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