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7일 인쇄
2018년 8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8월호 통권 510호 |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춤 스크랩북

 

風雲의 삶이 잠든 만주 땅
- 나의 아버지



趙 東 華
(월간 춤 발행인)

나의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5학년 때 57세로 세상을 뜨셨기 때문에 나의 중요한 성장과정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고 안스러움이다.
아버지는 4남1녀 중 맏이, 그러니까 가문의 상속자였다. 그런데 왜 그랬던지 장가들고 얼마 안 되어 집을 떠나 만주 땅 안동에서 상투를 자르고 장자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편지와 함께 할아버지에게 보냈다.
할아버지는 편지를 받고 그날로 아들 잡으러 함남 정평(咸南 定平)에서 안동으로 달려갔었으나 이미 아버지는 그곳에 있지 않아 집으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앓아누우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기약 없이 떠난 아들을 기다리지 말고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는데 이것은 필경 아버지의 편지 내용과 관계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할머니의 추측이셨다.
어떻든 아버지는 그렇게 만주로, 중국으로 그리고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도크(海參威)에서 어머니를 만나시게 되고― 두 분은 같이 고향으로 돌아왔었다는데 그때가 3·1 만세운동 때여서 정평읍내(邑內) 모든 청년들이 일본경찰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자 아버지는 다시 육로로 러시아로 도망치게 되고 뒤쫓아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러시아로 들어가고― 하는 인생전반기를 그렇게 사셨다.
아버지가 중국말, 일본말, 러시아 말이나 글에 능통하셨던 것은 모두 이런 젊은 시기의 방랑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 신당(新黨)이 이기자 두 분은 우리나라로 나와야 했고, 회령(會寧)에 정착하게 된다. 우리 집에선 제정(帝政)러시아를 구당(舊黨)이라 하고 볼셰비키를 신당이라 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우리나라로 나왔다는 말에 아들을 고향으로 데려가시려고 무척 애를 쓰셨던 모양이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흔적이 우리 집 옷장 설합 속에 할아버지가 며느리인 우리 어머니한테 보낸 여러 개의 두루마리 편지로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며느리를 통해 아들을 귀향시키려는 애절한 사연의 편지였다.
아버지는 회령에서 운수(運輸)회사 사원으로 있었다. 일본인 사장 다음 가는 자리였다. 그때 회령을 기점으로 그 이북은 궤도차(軌道車)가 다녔고 그 이남은 큰 철도였는데 회령은 만주에서 실려 오는 곡물 집산지였을 뿐 아니라 두만강으로 타고 내려온 뗏목으로 만든 목재와 석탄산지로서의 주요한 교통요지여서 운송회사는 다른 고장보다 컸고, 중요한 일을 했었다.
나는 아버지가 월급장이로 10년 이상 있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오래 계시던 그 회사를 그만두시고 퇴직금으로 넓은 뜰이 있는 집과 길가의 점포 등을 사셨다. 뭔가 혼자서 하실 일을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만선일보(滿鮮日報)라는 신문 지국을 차리셨다.
우리 집 마당은 돌로 여러 가지 높이로 쌓은 화단이 있었고 그 화단에는 죽은 고목과 괴석들이 있었다. 앵두, 살구, 왜지 같은 과일나무, 그리고 겨울이면 부엌 움 속으로 옮겨야 하는 파초 같은 것도, 또 꿀벌도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아버지는 이런 것에 흥미를 느끼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이내 위장병 때문에 알아 눕게 되었고 병 고치시러 서울로도 여러 번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다.
어떻든 아버지는 3년 콩죽으로만 사셨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상은 병 속에서 일기를 계속 쓰시는 모습이다. 그리고 신문을 스크랩하시던 모습, 그래서 책장은 그런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또 병상 속에서도 아버지는 다섯 살 되는 동생에게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치던 광경이 기억된다. 가르치실 때는 신경질이셨다. 용서가 없었다. 아버지의 그런 성격이 나는 무서웠다. 그래서 결국은 학교 가기 전에 나도 아버지한테서 배우던 천자문을 끝내 마치지 못하고 친척 큰아버지라는 분한테로 옮겨가 천자문을 마쳤던 것. 어떻든 당시 동생은 아버지에게 많이 시달렸다.
이런 기억이 내게는 아버지가 무섭고 엄한 분으로만 여겨지게 된 연유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아버지는 공부 이외에 우리의 행동에는 아주 관대하신 분이었다. 말하자면 내가 높은 나무에 올라가건, 지붕 위에 올라가건, 또는 장마진 강에 가서 헤엄치건 간에 일체 ‘혼자서 알아서 하라―’ 는 식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매사에 간섭하고 주의를 주시는 아버지와는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셨다.
어떻든 아버지의 오랜 병 때문에 집안이 구차해지자 우리는 꽃밭 있는 큰 집을 팔고 세 주었던 길가 점포집으로 옮겨갔다. 여기서부터는 어머니가 살림을 꾸리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는 서울서 누비이불을 부쳐다가 그것을 머리에 이고 먼 시골로 팔러 다니셨다.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돈으로 아버지 약값, 우리 형제를 중학에 보내고 막내를 국민학교에 보낸 정도였으니….

임종은 중국의 太原(태원)에서
얼마 후 아버지는 병이 나으셨고, 중국 태원(太原)에 계신다는 친구와 어떤 상담이 있어서 그리로 가시게 되었다. 살림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신 일은 우리 집을 위해 정말 잘된 일이었다. 얼마 계시지 않아 아버지가 작은 인쇄소를 인수하게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와 우리 집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부터는 우리 학비를 아버지가 부쳐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시 물자가 귀한 때였는데도 우리 형제만은 상해제(上海製) 농구화랑 멋진 옷을 입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년 전, 5년 만에 마치 자기의 죽음을 예측이나 했듯 홀연히 회령에 나오셨고 한 번도 가시지 않았던 고향 할아버지 묘소도 돌아보셨다. 오시던 길에 함흥에 있던 나에게 들리셨다.
아버지와 나는 만세교(萬歲橋)를 같이 건너며 뭔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는 4학년생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무서움도 없었고 어쩐지 아버지가 나약하게 보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태원으로 돌아가신 다음해 3월, 그 위장병이 다시 도져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외롭고 허전하였다.
나와 어머니는 20일 가까운 수속을 밟은 후 그 유골을 모시러 중국 태원으로 갔었다. 중국이란 곳은 정말 메마른 산만 있는 곳이었다. 나는 아버지 계시던 방에서 그의 일기장과 완성하지 못한 편지 등을 찾아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외롭게 돌아가신 것이 너무도 슬펐었다.

- 月刊 老壯 1985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