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7일 인쇄
2018년 8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8월호 통권 510호 |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춤산책

 

세 가지 국적을 가진 사나이, 세 가지 이름을 가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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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李東祐)(춤평론)

세대가 다른 일본 속의 두 조선인이 있다.
면식이 전혀 없는 이 두 사람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상반된 길을 가고 있다.
한 남자는 1세기 전에 태어나 격랑의 세월 속에서 상황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어가며 부와 명예를 누리다 삶을 마감했고, 한 사나이는 풍랑의 역사가 지나갔음에도 선조로부터 지켜온 정체성을 계승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세 가지의 여권을 사용해가면서도 흔쾌히 좁은 길을 선택하며 지금도 편견과 싸우며 살고 있다.

세 가지 국적을 가진 사나이
안영학은 일본태생 조선인 축구선수다.
조선인이란, 일본, 남한 그리고 북한 중 그 어느 국적에도 속하지 않은 일본 속 한국인이라는 뜻이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속하지 않은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귀화하지도, 그렇다고 북한의 조총련이나 남한의 민단에 속하지도 않은 중립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어딜 가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이들은 일제시대 때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살게 되어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소속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편견을 받고 살면서도 지금껏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금껏 한국전쟁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조선’ 신분으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이다.
일본 내 안영학 선수와 같은 조선인은 약 30만여 명. 60만여 명이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지키고 살았지만 지금은 그 인구가 반으로 줄은 것이라고 한다. 모르긴 해도 이상 (理想)을 지키고 살기에는 제도적인 제약과 차별 등이 그 원인일 듯 하다.
그 덕분(?)에 안 선수는 세 나라에서 선수로 활동한 특이한 경험의 소유자가 되기도 했다. 안.영.학. 이라는 조선이름 석 자를 지키며 일본에서 조선학교를 다녔고, 2002년에서 2016년 까지 일본과 한국의 프로축구단에서 활동했으며, 역시 2002년부터 북한 국가대표 선수로도 활동했다. 그나마 안 선수는 운이 좋은 편이다. 대부분의 일본거주 ‘조선’ 국적자들은 조선학교를 졸업을 해도 학력인정도 받지 못하고 또 제대로 취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권도 세 나라 모두를 다 가지고 다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발행한 북한 여권으로 해외에 나가 일본에 돌아올 때는 일본에서 발급받은 재입국 허가서로 입국을 하고 남한에 갈 때는 여행자 증명서, 즉 대한민국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한국을 가는 방식인 것이다.
전쟁 중 남이나 북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서로 죄악시 여기고 동포끼리 승냥이니 꼭두각시니 라고 서로 비하와 증오를 서슴지 않았다. 식민지시대를 막 벗어나자 시작된 이념의 전쟁 통에 남과 북에 대한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서 각자의 길을 택할 사람이 전체 인구 중 몇 명이나 됐을까. 지금의 우리는 역사를 전지적 입장으로 쉽게 판단하지만, 막상 그 당시에서는 모든 것이 암흑기와 같은 상태였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서로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민단과 조총련은 ‘조선인’들을 영입하기 위해 애쓸 뿐, 이들의 신변에 대해서는 양쪽에서 조차 애써 외면해오고 있다.
언제 조선이 독립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항일운동을 한다는 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아득히 길고도 외로운 싸움이었을 것이다. 애매모호한 태도 때문에 친일과 항일운동의 중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그렇기 때문에 항일 운동가들이 더욱 빛나보이듯,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본디 하나 됐던 그때의 나라만을 인정하고 고유의 정서와 문화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사회적 제약을 무릅쓰고 라도 타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은 해방 이후로 지금껏 줄곧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그들에게는 자주독립 조선은 아직 요원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인전에 나오는 항일운동 지도자뿐만 아니라 이들 역시 애국자로 여겨야 될 것이며, 이들을 생각하더라도 하루빨리 남과 북이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 가지 이름을 가진 남자
2016년 1월 16일, 미국 NBC에서 방영되는 대표적 토크쇼인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 Starring Jimmy Fallon)」에 한 유명 코미디언이 출연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생소하지만, 정치적 풍자와 단독 코미디 콘서트를 통해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인물이다. 음악적 재능도 있어서 희극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뮤지션을 꿈꾼 다재다능한 예능인이다. 그의 부모는 예술적인 재능과 별 관계가 없었지만, 그의 조부로부터 예술방면으로의 재능을 이어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조부모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자랐다. 1941년생인 그의 아버지는 독일인 어머니의 손에 키워졌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의 아버지를 모른 채 자랐고 그 역시 조부를 서너 차례밖에 만나보질 못했다한다. 그리고 「투나잇 쇼」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조부모에 대해 그의 부모가 해준 이야기와 조부의 생전에 잠깐 만났던 기억만으로 토크쇼에 출연해 자신의 할아버지는 기념박물관도 있는 “일본 무용가“라고 자랑스럽게 밝혔던 것이다. 그는 그 증거로 조부의 사진을 몇 장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가 보여준 사진은 놀랍게도 우리에게도 친숙한 사진이었다.
2017년 10월10일, 그는 미국 교육방송 (PBS)에서 방영한 「당신의 뿌리를 찾아서(Finding Your Roots)」에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뿌리를 상기시켜주는 프로그램으로 출연자들은 현재 미국의 정치, 문화 등을 움직이고 있는 유명 인사들로 이루어져 흥미를 더한다. 백인처럼 보이나 조상 중엔 흑인이 있는 사람도 있으며, 이 사람처럼 동양인이 가족 중에 있으리라고는 외모로만 봐서는 그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인물도 있다.
의뢰자의 이름은 프레드 아미슨. 그 역시 겉으로만 봐서는 일본인 선조를 둔 것 같지 않은 생김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에하라 마사미(江原正美) 혹은 예명으로 가장 잘 알려진 쿠니 마사미(邦正美)로 알고 있던 그의 조부가 조선출신 박영인(1908∼2007)임을 알게 됐다.
박영인은 한국 근대 춤 역사상 조택원, 최승희와 함께 조선의 3대 엘리트 출신 무용가이면서도 세 인물 중 현재 한국에서는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박영인보다는 쿠니 마사미로 일본에 더 잘 알려진 귀화인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독일에 유학하여 2차 대전 중 독일에서 마리 뷔그만이나 루돌프 라반 등을 사사 및 교류하는 이외에도 당대 독일의 저명인사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여기서 그쳤으면 F. 아미슨 역시 자랑스러워하며 훈훈한 분위기에서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동경제대 미학과 졸업 후 1937년 일본 정부 장학금을 받고 독일 유학을 떠나 약 반 세기란 긴 세월을 독일에 머무르며 일본 유학생으로, 일본의 현대 무용가로, 괴벨스의 나치 선전부 소속으로 자청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스파이로 활동한 것이다. 나치의 선전부가 된 것은 스파이임을 들키지 않으려 자청한 것이라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쿠니 마사미는 독일여성을 만나 아기를 가졌는데 그 아이가 후에 프레드 아미슨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F. 아미슨은 방송 초반만 해도 이미 토크쇼에서 자신의 일본인 할아버지를 소개한 것처럼 무척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대부분 방송의 후반부에 들어서 자신의 뿌리를 알고 나서는 뿌듯해하며 마무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행적을 알고서는 무척 난감해 하는 듯 보였다.
이제는 이 같은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독일에서의 쿠니 마사미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있으랴싶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을지 알 수는 없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러우면서도 (현재까지는) 그가 일본인으로 귀화한 것이 다행이라 여길 만큼 일본인을 제외한 전 세계인들에게는 부정적인 인물로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해방 전에도, 이후에도, 자신이 조선인임을 불편해 했으면서 어떻게 스스로 예명을 ‘나라’를 뜻하는 “쿠니(邦)”라고 지어가며 “세계시민(Cosmopolitan)”이라고 선언했는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1)

하나 된 조선을 기다리며 오늘도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는 안영학과 조선인에서 일본인으로, 독일 거주민2)으로 변신을 거듭하다 결국 ‘코스모폴리탄’ 이라고 얼버무린 박영인, 혹은 쿠니 마사미 -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살고 싶어 한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각자의 확실한 가치관으로 판이한 삶의 형국을 보여주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의 의미, 과연 누가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인지 광복절을 맞는 8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물음을 던진다.
오늘날과 같이 강자 편에 붙어 능률 위주 그리고 무사안일주의의 유혹이 강한 경쟁의 사회에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잠재적인 친일파를 양산해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전자가 후자보다는 훨씬 더 답답하고 미련한 인간형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힘들어도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며 오늘을 견디기 보다는 후자처럼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용의주도한 인물이 되어 제 한 몸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장수까지 누린 사람을 이상적인 인물로 흠모하고 닮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그러나, 인생의 끝에서 자신을 뒤돌아 무엇을 위해 살았나를 자문해볼 순간이 온다면 어떠한 삶을 살았다고 대답 할 수 있을까. 거창하게 세계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어떠한 가치관으로 살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만 같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부끄럽지 않은 ‘나’가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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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인의 형 박영철 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장을 갖추어 입고 공연장을 찾아올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는 한 한국무대에서 활동할 수는 없다고 말했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서대헌 기자, 경상일보, 2005. 05. 23.

2) 1939년 요미우리신문에 쿠니 마사미는 나치 선전부에 자청해 들어가 그들 앞에 춤을 추는 이유를 “누구나 고국을 위해 싸우는 영웅적 병사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독일의 거주민으로서, 독일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주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