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7일 인쇄
2018년 9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9월호 통권 511호 |2019년 9월 21일 토요일|
 

춤 스크랩북

 

우직하고 세련 안 된 純粹人 건축가 金重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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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 東 華
(무용평론가)

김중업과 나는 개띠 동갑.
인생 30대는 공연히 목에 힘주고 사는 가장 폭없고 낯을 가리는 시기인데, 그 시기에 우리는 끼리끼리를 알아보는 그런 예민한 후각으로 서로를 찾아냈다.
그 당시 우리는 10명 내외로 한정된 ‘꽃클럽’이라는 작은 사교모임에서 만난 것이다.
그의 첫인상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 지극히 솔직한 무례한(無禮漢, 無賴漢무뢰한이 아님)이었다. 사실 매사가 점잖게만 이끌어지던 이 모임의 물줄기가 김중업으로 해서 그야말로 인간적, 아주 인간적인 것으로 변모하게 된다.
형식생략론(形式省略論)은 모임에 즐기는 시간을 많이 만들게 한다. 그래서 그 꽃이 진 지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당시의 멤버들은 그때의 김중업에 향수를 느낀다.

김중업은 거구, 적당히 휜 부분도 나온 부분도 없이 그대로 곧게 서 버린 키. 담배 필 때면 뻐끔뻐끔 소리를 내는 버릇도 있고,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떻든 명쾌한 결론부터 먼저 내리고는 누가 뭐라든 자기 결론을 밀고 나가는 우직한 성격― 그러니까 그게 어디 그렇게 통하는 세상인가. 다른 사람의 표정도 좀 봐주면서 적당히 나가는 거지.― 그래서 매번 곤욕을 치렀으면서 말이다. 이건 세련되지 못한 그의 평안도 성격 때문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런 순수함을 그에게서 뺀다면 정말 김중업을 지탱하는 향기나 매력이 뭘까 하는 것을 생각할 때가 있다.

김중업이 건축가임을 보여준 대목은 아무래도 주한 프랑스대사관을 지을 때인 것 같다. 프랑스대사관이면 으례 프랑스인이 설계해야만 할 것 같았는데, 한국인 김중업에게 맡겨졌다는 것이 뭔가 우리가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긍지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어떻든 그래서 나는 대사관을 짓는 현장엘 몇 번 갔었지.
김중업의 자랑은 대사관 본관 지붕을 한국식 지붕처럼 추녀 끝 네 귀를 치켜들게 하는 것이라 했다. 물론 그때 나의 심미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그런 콘크리트 지붕의 선이 정말 한국적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꼭 긍정적은 아니었으나, 그 후 오랜 세월 그 지붕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날씬한 아라비아말 발목 같은 네 기둥 위에 나비처럼 가볍게 올려 앉힌 그 지붕의 품은 틀림없이 한국적이고 결코 우리 환경에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나 같은 지식인보다 20년은 앞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한번은 그 지붕 위로 올라갔었다. 그러나 그 위는 밑에서 보는 그런 부드럽고 날씬한 것만 아니고 깊고 넓은 웅장한 대접처럼 만들어진 마치 큰 푸울장 같은 복잡한 구조였다. 건축이란 복잡한 거로구나, 나는 그 높은 지붕 위에서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김중업은 그 건물에 무언가 자기를 걸고 있었다. 건물 벽에서는 경주 쪽에서 주워온 신라와당(新羅瓦當), 귀면(鬼面) 파편들을 붙였었는데, 그 붙이고 남은 파편들을 가마니 두세 개에 가득 채워 마당 어구에 놔져 있었다. 그때도 아직 이런 신라와당들이 건축재로써 쓰일 정도 흔했던 것은 아닌데 김중업은 이런 것까지도 아깝지 않게 활용하고 있었으니까.

지난 정초 우리는 이행로(李幸鷺)씨랑 같이 차를 마시면서
조 : 그때 남은 신라와당들 어디다 썼지?
김 : 아마 대사관 구내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 뭐.
지극히 대수롭지 않는 담담한 그의 답변.
옛것을 아끼는 그가 신라와당 두세 가마의 행방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니. 그러나 김중업의 성격 특징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가 있을 것 같다. 이미 끝난 일에는 집착하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 말이다.

아직 성북동 간송(澗松) 미술관 남쪽 뜰이 넓은 포도밭 구릉으로 그대로 있을 때, 김중업의 집은 골짜기로 올라가는 길가 바른편에 있었다. 큰 한국 대문이 있는 그런 멋진 집이었다. 그러나 이 집은 그가 삼일빌딩을 짓고 설계비를 받지 못해 세금 때문에 팔려 버렸다. 그때 그 집 정원에 놓였던 안목 높은 석조물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탑, 부도(浮屠), 괴석 등 정말 엄청난 물량의 진귀품들이었지만, 주인이 없어지자 그것들이 뿔뿔이 모두 흩어졌다는 이야기를 후에 들었을 때 그리도 허망한 생각이 들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김중업은 돌에 관한 한 탐미적(耽美的)이고 경제적 균형을 잃는 사나이였다. 눈에 드는 돌만 나타나면 한푼 없던 돈도 어디선가 나타난다. 아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가 옳다. 그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후도 몇 번 집을 옮겼고― 그때마다 나는 그의 집으로 차 마시러 갔었다.
한데, 그때마다 무거운 돌들은 마당에 옮겨져 있고, 그때마다 또 돌의 수가 늘고 있었다. 이제는 꽤 많은 것이 모였을 것이다. 그것이 버릇이니까.
어느 날 어떤 그림 전시회장에서 나는 김중업을 오래간만에 만났다. 실로 8년만의 만남이었다.
조 : 언제 왔어.
김 : 얼마간 됐어.
조 : 왜 전화 안 했어.
김 : 너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
그래. 날 찾으려면 못 찾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굳이 나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원래 친구란 그런 것이 아닌가. 나 역시 그랬으니까 말이다.
나는 잡지를 만들고 있다는 말을 그에게 간단히 하고 그 자리에서 글 하나를 청탁한다.
그리고 며칠 후 그림 한 장과 「8년만의 귀국」이란 그의 글을 받는다.

“이렇게 적다보니, 몬로의 7년만의 외출이란 영화의 화사하던 장면이 눈에 떠오르는데, 우리나라도 무척 변해 마치 서울 거리의 에뜨랑제 같은 자신에 소스라친다.
자용(子庸)의 에밀레 박물관의 민화 리프린트전(展)이 있어 오랜만에 되만남의 뜨거운 자리에서 동화(東華)가 ‘춤이 있는 풍경’의 그림과 글을 청하기에
지난 연말―
운사(雲史) 외 옥윤(玉潤)이와 같이 나의 ‘종묘(宗廟)’에서 우리들의 일을 오순도순 되새긴 밤. 비함(毘含)과 호미(浩美)와 어울려 공간사랑에서 공옥진(孔玉振)氏의 『허튼춤』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아찔한 감동에, 어머니의 태내에서 느꼈을 아득한 황홀조차 눈 속에 아른거린 귀한 추억이 되살아나
선뜻―
서울에 숨구멍을 뚫고 집들에 표정을 집어넣으려 되돌아온 나에게 넘실 어깨춤이 저절로 흐느는 집이 있음― 더욱 즐거우리라 믿어 그림과 글을 적어 보낸다.”

김중업은 건축도 건축이지만 시에 더 재능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건축은 하나의 시다.


「金重業」 悅話堂 刊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