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7일 인쇄
2018년 9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9월호 통권 511호 |2019년 9월 22일 일요일|
 

동숭문화광장

 

내일을 시작할 이유 내 일을 시작할 이유
-




오진이(吳鎭異)(서울문화재단 전문위원)

‘이토록 고고한 연애’는 예측이 되지만 ‘이토록 고고한 연예’는 예측 밖이었다.
「이토록 고고한 연예」는 역사소설을 즐겨 쓰는 소설가 김탁환의 신작이다. 산대놀이 등 조선시대 공연예술 연구자인 중앙대 전통예술학부의 고(故) 사진실 교수가 오랫동안 소설로 써보라고 제안했다는 ‘달문’이란 인물의 이야기이다. 달문(達文)은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의 주인공인 ‘광문’(廣文)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여러 사료에 나오는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이토록 고고한 연예」속에서 ‘달문’은 조선에서 가장 착하고, 가장 못생기고, 가장 춤을 잘 추는 인물이라고 나온다. 남을 안 웃기고는 못 배기는 재치와 착한 성정, 놀라운 춤사위, 추한 외모를 한 몸에 소유한 조선시대의 유일무이한 연예인이다. 얼마나 착한가 하면 ‘걸인들 사이에 식중독이 돌자 제 입을 찢는 대가로 돈을 빌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죽을 쑤었다’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특히, 내가 달문에게 빠진 것은 소설 속에 나오는 그만의 독특한 분배방식 때문이었다. 소설을 옮겨본다.

… 달문은 수표교 거지패 왕초였다. 왕초는 구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지패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모두 결정했다. 왕초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이 거지패의 법이었다.
(중략)
왕초치고 빼빼 마른 놈은 없었다. 구걸해온 음식 중에서 절반을 먹든 전부를 먹든 왕초 마음대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달문은 살점이라고는 없는 홀쭉이었다.
달문이 주먹을 쥐곤 커다란 제 입에 넣었다가 뺐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논의를 시작한다는 약속된 손짓이었다. 거지들이 각자 구걸해 온 음식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달문은 거기 한 명마다 먹고 싶은 양과 그 이유를 들었고 그에 대한 다른 거지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자기가 구걸한 양보다 적게 먹겠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욕심을 부렸다. 그때마다 달문은 거지들이 모두 인정하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의논하고 또 의논했다. 마지막까지 결정되자 달문이 일어섰다. …

여기서 소설을 이끌어가는 매설가(이야기꾼) 모독이 분배방식이 너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자기가 구걸한 만큼 먹든가, 모두 거둬들여 사람 수만큼 나누면 간단히 끝날 일 아니냐’며 반문하자 달문의 답변이 감동이다.

“구걸이 쉬워보여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죽는 둥 사는 둥 최선을 다한 결과입니다. 함부로 나눠선 안 됩니다. 이게 내 일을 시작한 이유거든요. 내가 아파서 구걸을 못하는 날에도 굶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기면 으르렁 거리며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1/N로 나누면 더 일하려고 들지 않고, 각자 구걸한 만큼 먹게 하면 함께 일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네가 지켜주고, 너는 내가 지킨다는 상호호혜의 신뢰가 있어야만 ‘내일 일을 할 이유’와 ‘내 일을 할 이유’가 생겨나는 법이다. 난 소설을 읽으며 조선시대 이토록 고고한 연예인 달문의 분배방식을 예술지원의 새로운 방식으로 도입해보면 어떨까 란 생각이 들었다.
각 장르의 공모를 통해 들어온 작품창작지원서를 놓고 늘 그 나물에 그 밥인 평가자들이 심사해서 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해당된 분야의 지원자들이 다 모여서 저마다 창작 계획과 자신의 처지와 세계관을 이야기하며 함께 들어보고 참가자들이 합의를 도출해보는 방식이다. 물론 한꺼번에 다 적용할 수는 없으니 이런 방식에 긍정적인 장르라도 실험적으로, 부분적으로 해본다면 또 다른 대안이나 중재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긍정적인 관계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고 하지 않든가? 달문의 분배방식에 마음이 가는 것은 사람이란 모름지기 잘하고 잘못하고를 구분지우고 경쟁시키기보다 저마다의 고유한 장점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발휘하게 할 때 개인적으로도 성장하고 관계 또한 좋은 사이로 변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예를 살펴보면 지난 5월 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세계지방정부연합(UCLG: United Cities and Local Governments)유럽회의’에서 99개의 후보 도시 중 제3회 ‘국제문화상(International Award UCLG-Mexico City-Culture 21)’을 수상한 서울시 성북구의 ‘공유성북원탁회의’의 운영방식을 들 수 있다.
세계지방정부연합은 180여 개국 1,000여 개의 도시의 지방정부들이 정보와 정책을 공유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국제기구로 지방자치와 분권, 지방재정, 성평등, 문화, 사회통합, 인권문제를 주 의제로 다루는데 거기서 성북구·성북문화재단·공유성북원탁회의의 민관 참여 거버넌스 사례가 심사위원들로부터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한 완벽한 문화정책 사례”라는 찬사를 받으며 ‘국제문화상’을 수상했다.

‘공유성북원탁회의’는 성북문화재단 설립(2012년 9월)이후, 지역 내 문화예술인들과 성북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제안해 2014년 1월 시작된 지역문화예술 네트워크로 2018년 5월 기준으로 53번의 모임을 가졌는데, ‘자율적 활동(자발성)’, ‘문화민주주의(민주성)’, ‘우정과 협력(연대성)’, ‘문화 다양성을 통한 차이의 존중(다양성)’ 등 네 가지의 가치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운영위원 선발제도이다. 운영위원이 되고 싶으면 누구나 손만 들면 되고 20명의 운영위원 가운데 2명의 공동운영위원장을 선출하는데 1명은 추천과 토론, 투표의 방식으로, 다른 1명은 본인이 하고 싶거나 혹은 추천받은 사람들 중에서 ‘사다리 타기’로 뽑는다고 한다.
특별하고 출중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대표가 될 수 있다. 임기 1년(연임 불가)의 원칙을 지키며 지금까지 8명의 공동운영위원장을 선출했다. 현재 300여 명(운영위원 20여 명, 워킹그룹별 활동가 100여 명, 기관 관계자 30여 명, 모임 참여 예술가 및 주민 150여 명)이 함께 모여 서로를 ‘친구’라 부르며 활동하고 있다.
국제문화상을 받으러 멕시코로 가는데 누가 갈지 그 기회를 정하는 것도 ‘사다리 타기’로 한다고 전해 들었다.1)

또 다른 예로는 녹색당의 대의원 전면 추첨제를 들 수 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선거로 대표되는 현대의 민주주의 제도는 민의의 왜곡, 일부 엘리트 집단의 권력 독점,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등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녹색당이 도전하는 전면 추첨에 의한 대의원 선출과 이를 통한 대의 제도의 구상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시민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풀뿌리민주주의의 본질적 의미를 당 안에서부터 회복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며 도입 배경을 설명하였다.
지역과 연령을 고려하여 30명당 1명씩 추첨을 통해 대의원을 선출한 결과 모든 대의기관 및 위원회 구성 시 여성비율이 남녀동수로 50%여야 한다는 당헌에 따라 대의원의 53%가 여성이고 13세의 최연소 대의원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지난 지자체장 선거 시 서울시장 녹색당 후보로 28세의 신지예 후보가 나오게 된 배경도 이런 대의원 추첨제가 있어 가능했다.
추첨제의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테네에서는 관직을 뽑을 때 대표적인 민주주의 방식으로 추첨하는 방식을 택했다. 정부 관료 700명 중 600여 명을 제비뽑기로 뽑았으며 임기는 1년이고 연임은 금지했다. 또 엄격한 자격관리를 실시하여 잘못했을 경우에는 처벌이나 탄핵 등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었다고 한다.

한편, 최근에 본 KBS 1TV 「다큐 공감」 ‘파도치는 섬, 바위에 붙어살다’ 편이 인상적이었다. 전라남도 맹골 죽도에서 살아가는 일흔 훌쩍 넘긴 할머니 두어 분과 고기잡이 하다 들른 어부 두엇, 귀향을 한 후 도시를 오가며 살고 있는 주민 몇 명, 그렇게 여남은 명이 모여 사는 15가구 주민들의 이야기인데 평소엔 조용하다가 돌김 채취를 하는 1월과 돌미역을 채취하는 7~8월이 되면 객지 나가서 살던 주민들은 물론 자식들까지 휴가를 내고 섬으로 달려온단다. 설 명절, 추석 명절보다 훨씬 더 큰 죽도의 ‘김명절’, 죽도의 ‘미역명절’인 셈인데 급한 물살에 휩쓸려 목숨이 위험하기도 하고, 절벽을 타고 내려가 갯바위에 붙은 김을 손톱이 긁어 대도록 돌미역을 뜯어낼 정도로 고생 고생하여 수확하는데, 그 귀한 수확물의 분배원칙이 재미나다.
집집마다 고생스레 수확한 만큼 철저히 분배하여 이익을 가져갈 법 하련만, 그들은 돌미역이 담긴 붉은색 고무 대야에 슬리퍼, 고무신, 등 자신이 신고 있던 신발을 담은 후에 주사위 던지듯이 신발을 냅다 던진다. 그리고 던져진 자기 신발과 가장 가까운 위치의 대야 수확을 자신의 수확으로 기쁘게 가져갔다. 논밭 대신 한 뼘도 안 되는 거친 파도 앞 갯바위를 텃밭 삼아 악착같이 돌미역을 채취하는 죽도사람들이었지만, 분배에서 만큼은 그 악착스러움이 사라지고 내남없이 다 같이 나누는 너르디너른 마음이었다. 어쩌면 다 같이 파도에 맞서 어렵게 살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누가 조금 더 가져가고 못 가져가고는 썩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오랫동안 몽골 죽도마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했다.2)

앞서 살펴본 김탁환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달문처럼, 공유성북원탁회의의 사다리타기처럼, 녹색당의 대의원 선발제도처럼, 맹골 죽도마을 사람들의 신발 던지기처럼 서로 믿고 헤아려주는 분배방식이 예술지원제도에 녹아들기란 왜 이리 어려운 걸까?
1973년 이후로 시행하고 있는 예술지원제도의 경직된 심의 평가 제도를 개선해 보자는 취지에서 외부 심사위원이 아닌 참여 예술가 전원이 직접 선발하는 권리를 갖는 서울문화재단 서교예술실험센터의 ‘소액다건’이나 ‘최초예술지원’ 및 인천문화재단의 ‘바로 그 지원’ 등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지만 아직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여기엔, 보조금관리규정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선결과제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21세기의 예술창작이란 공기처럼, 물처럼, 전기처럼, 가스처럼 우리에게 미적 체험을 경험케 하는 공공재이며 이것을 작업하는 예술가는 나의 지루한 일상에 의미와 상징과 재미와 다른 시각 등을 선물해주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근본적인 믿음과 애정이 부족하기만 하다.
과연, 우리는 ‘내일을 시작할 이유’와 ‘내 일을 시작할 이유’를 지금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ㅡㅡㅡㅡㅡㅡ
1) 서울문화재단 刊 「문화 + 서울」 8월호 내 박현진 기고 글 중 부분 인용
2) KBS 1 TV 공감 다큐 내에서 부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