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7일 인쇄
2018년 9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9월호 통권 511호 |2019년 1월 22일 화요일|
 

꽃향시향

 

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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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영(朴濟瑩)(시인, 달아실 편집장)

올림픽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변 벽과 담을 가득 메우고 전신주며 가로수까지 친친 감아 올라간 것들이 눈에 띕니다. 어느 마을, 어느 골목에도 빨간 벽돌집이 있고, 그 빨간 벽돌집에는 으레 바닥에서 시작된 것이 벽을 타고 올라 빨간색을 푸르게 물들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담이 있으면 그예 그 담을 타고 올라가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담쟁이라 불렀다지요. 담쟁이를 한자로 조()라고 하는데, 풀()과 새(鳥)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새처럼 하늘로 오르는 풀이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럴듯하지요.

담쟁이는 포도과에 속하는 넌출성 식물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 잎이 포도잎과 무척 닮았지요. 그런데 덩굴도 아니고 넝쿨도 아니고 넌출성 식물이랍니다. ‘넌출’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길게 뻗어 나가 늘어진 식물의 줄기. 등의 줄기, 다래의 줄기, 칡의 줄기 따위이다”라고 나오네요. 그래서 이번에는 ‘덩굴’을 찾아봤습니다. “길게 뻗어 나가면서 다른 물건을 감기도 하고 땅바닥에 퍼지기도 하는 식물의 줄기. 유의어로 넝쿨, 넌출, 줄기가 있다”고 합니다. 내친 김에 ‘넝쿨’도 찾아봤습니다. “덩굴의 같은 말”이라고 나오네요. 참 싱겁지요. 아무튼 넌출도 덩굴도 넝쿨도 다 한 족속임을 알았으니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되는 거였습니다. 다시 담쟁이로 돌아가서, 담쟁이가 나무나 담을 휘감거나 타고 오를 수 있는 것은 그 줄기에 개구리 발가락같이 생긴 흡착근(吸着根) 덕분이지요. 담쟁이덩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 수 있습니다. 최승호 시인은 그 흡착근을 일러 낙지발이라 하기도 했습니다만. “허공이 바닥 밑으로 주저앉는다 해도 기어오르고 / 줄기가 토막난다 해도 거대한 낙지발처럼 꿈틀꿈틀 뻗어 나갔을 것이다”(최승호, 「담쟁이덩굴」 부분).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그 모습 때문일까요. 동서고금 무척이나 많은 시인들이 담쟁이를 소재로 시를 썼고, 무척이나 많은 화가들이 담쟁이를 그렸지요.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도종환, 「담쟁이」 전문

도종환 시인이 지금은 장관이 되었지만, 이 시를 쓸 때만 해도 해직 교사였지요. 해직 교사였을 그때의 비장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해직 교사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 지금, 그는 과연 담쟁이처럼 벽을 넘은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도 담을 오르고 있는 중일까요. 한 담을 넘었으나 다시 또 넘어야 할 거대한 벽들…. 어쩌면 삶이란 벽을 넘은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오르고 넘는 그 과정일 뿐이겠다 싶기도 합니다.
같은 담쟁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조금 다른 시선을 취하고 있는 시, 최광임 시인의 「담쟁이」도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제 나는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내 살 속 뿌리를 내리고 키돋움하며 오르는 일
처음엔 나의 알맞은 집은 아니었다 어느 날
달그락거리는 뼈만 모여 살던 삶
떡잎의 네 사다리가 되어도 좋을 듯했다 옆에는
흐드러진 능소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너를 만났다는 것이다
다족류의 곤충처럼 셀 수 없는 네 손길은
갈비뼈를 어루만지며 살을 붙이기도 하고
뼈와 뼈를 맞추기도 하고 살과 뼈 사이
아귀틀림을 다듬기도 하며 나를 지워갔다
미처 허공에 줄을 긋지 못한 거미들이
너와 나 사이를 지나쳐 가기도 하였으나
벌레들이 네 몸을 뒤집어 집을 짓고
얼크러진 꿈들을 채우는 일 보며
나 없이 너의 뼈가 되어 살아도 좋았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계절풍처럼
일정하게 떠나기도 하지만 이내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길 지워지지 않도록
검게 야윈 금들을 붙잡은 축원
끝나고도 식지 않는 사랑이다
― 최광임, 「담쟁이」 전문

도종환 시인이 바라보는 담쟁이와 최광임 시인이 바라보는 담쟁이는 조금 다르지요. 전자의 담쟁이가 삶의 외피를 다뤘다면, 후자는 삶의 내피를 다뤘지요. 전자가 나와 사회의 문제라면 후자는 나와 너의 문제이지요. 전자가 삶의 방식을 다룬 것이라면 후자는 사랑의 방식을 다룬 것이지요.
앞의 두 시와는 또 성격이 조금 다른, 담쟁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다른 시도 있습니다.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덩굴의 독법」이라는 작품입니다.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 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 나혜경, 「담쟁이덩굴의 독법」 전문

담쟁이의 모습을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과 연결하고 있지요.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하는 일이 어쩌면 서로를 읽는 일이겠다 싶기도 합니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완독해 보겠다고 / 지문이 닳도록” 아프게 읽는 일. “한 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 다시 시작하다 보면” 때로는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싶다가도 정작 중요한 문장을 놓치면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어야 하는 그런 게 또한 사랑 아니겠나 싶기도 합니다. 어떤 시인은 담쟁이가 나무를 친친 감아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끈적거리는 탱고를 추고 있다”고 했는데요. 한 사물을 보면서 참 다양한 시선을 취하는 것이니, 그런 게 또한 시를 읽는 재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혹시 담쟁이 꽃을 본 적이 있는지요? 제 주변에는 담쟁이는 아예 꽃을 피우지 않는 줄 아는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만, 담쟁이도 꽃으로 번식하는 식물이지요. 한 여름이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피는, 그 작고 앙증맞은 연두색 꽃을 보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려고 하면 볼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