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7일 인쇄
2018년 9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9월호 통권 511호 |2019년 5월 26일 일요일|
 

음악살롱

 

한국 가곡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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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만(李相萬)(음악평론)

한국의 예술가곡은 이제는 세계 속에 주목받는 예술의 한 영역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기독교의 선교사가 들고 온 찬송가이고 이는 1885년의 일이다.
1908년 육군시위군악대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에 의해서 창립되어 일반인들도 서양음악을 심도 있게 받아들였다. 기독교 계통의 배제학당, 이화학당은 서양의 노래를 가르쳤고, 평양의 숭실학교도 미국 선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서양 노래를 가르쳤다.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가 김인식(金仁湜)은 작곡도 배워 1900년 초 「학도가」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이것이 서양식 노래의 최초 작품이다. 그 후 이상준(李尙俊)도 많은 창가를 작곡했다.
1902년 독일에서 온 육군시위군악대의 지도자로서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는 고종황제의 위촉을 받아 대한제국 애국가(국가)를 작곡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선율을 바탕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었다.
이화학당에서 배운 성악가였던 임배세(林培世)는 감리교 찬미가에 「금주가」라는 노래를 써 올렸다. 에케르트 밑에서 군악대의 플루트 연주자로서 활동했던 정사인(鄭士仁)은 「망향(내 고향을 이별하고)」을 1926년에 작곡했다. 서정적이고 우리의 정서가 담겨졌다.
이 노래는 북한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 작곡했다고 잘못 전해져 「사향가」라고 불리고 있다.
1920년 난파 홍영후(洪永厚)는 소설 「처녀혼」 첫 장에 멜로디를 실었다. 1923년 김형준(金亨俊)이 가사를 붙여 「봉선화」라는 가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에 항일과 애국의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를 퍼트린 사람은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이다.
나는 1972년 「한국가곡전사」를 쓸 때 한국 가곡의 첫 작품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 이후 홍난파, 박태준, 현제명, 채동선, 안기영 등 선구자들의 노력으로 한국 예술가곡은 하나의 예술적 영역으로 정착되었다.
한국 가곡은 서울중앙방송국(KBS)에서 홍난파가 주도하여 가정가요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김성태(金聖泰), 이흥열(李興烈)이 합세하였다.
문화방송 등 민간방송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도 한국 가곡 보급에 합세했다. 최근 대중가요의 급성장으로 상대적으로 가곡의 보급은 주춤했다. 이런 찰나에 6년 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고학찬 사장이 부임해 가곡의 밤을 열어 지난 8월 25일 스물세 번째 공연을 가져 예술의전당 야외음악당에서 열기 있는 호응을 받았다.
황수경 고학찬의 재치 있는 사회, 소프라노 박정원, 테너 정의근, 소프라노 오미선, 바리톤 박경준, 테너 김승일, 바리톤 정경, 국악인 이밝음, 국군교향악단(지휘 김병기), 예술의전당 어린이 예술단이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