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7일 인쇄
2018년 9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9월호 통권 511호 |2019년 9월 21일 토요일|
 

관무기

 

서로 다른 실수
- 최성옥·김순정·김윤정·밝넝쿨




권경하(權炅河)(북쇼컴퍼니 대표)

* 오토 브루사티&최성옥 『베토벤과 카알』(8월25일 성남아트센터 앙상블시어터)
1823년, 병마와 가난으로 고통 받던 베토벤은 괴테에게 편지를 썼다. 베토벤은 자신의 조카 카알이 그리스어에 재능을 보이는 걸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비싼 학비를 대줄 능력이 없었고, 그래서 자신의 초라한 생활과 조카에 대한 관심을 간청한 것이다.
로맹 롤랑은 「괴테와 베토벤」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애절하게 간청하는 이 편지를 읽게 되면, 편지를 띄운 사람에 대해서나 받은 사람에 대해서나 똑같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인물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아프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조카 카알에 대한 사랑은 유명한 것이다. 베토벤에 관한 어떤 해설서나 영화에도 꼭 언급되는 부분. 지원을 요청하는 이 편지에 괴테는 묵묵부답이었다. 『베토벤과 카알』 역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조명한다. 베토벤의 카알에 대한 사랑 혹은 집착. 그리고 그 속에서 베토벤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고, 그의 기대에 부합 하지도 못하는 카알. 그 갈등과 압박은 카알을 라우엔슈타인 성의 폐허 위에서의 자살시도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의 공연이 있었다. 느릿느릿 걸어나와 구부정한 모습으로 노트를 펼쳐들고 한 남미작가의 맹인이 모티브로 나오는 글을 낭송했는데, 슈니트케의 피아노곡을 연주한 빨간드레스 입은 피아니스트의 파격적인 퍼포밍과 함께 기막힌 소리와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번 공연의 배우 베른하르트 마이첸의 나레이션은 바로 말코비치를 연상시켰다. 이들의 목소리는 금관악기같은 것이어서 부드럽게 말하다가 트럼펫처럼 폭발하는 매력적인 것이다.
작품은 배우의 목소리와 음악과 춤이 서로 주도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발란스있게 무대를 채워나갔다. 춤 역시 연기, 음악과 호흡을 맞추며 대사를 시각화하고 직관적으로 베토벤을 이해하는 데 일조했다. 초반부의 춤은 연기와 음악을 압도하며 시선을 빼앗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음악과 연기는 이제 할 얘기 다 한 분위기인데, 춤은 카알이 총까지 들고 나오며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60분을 넘어가면서 꽉 물렸던 짜임새가 느슨해진 느낌. 그래도 시종 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을 몰입시킨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베토벤의 음악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약점에 대한 조명은 독특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아무리 광대하고 심오한 천상의 음률이 머리에서 울려도 발은 흙바닥에 있는 게 인간이라는 것! 작품에서 사용되는 「현악사중주 131번」은 모든 것을 돌파한 역작인가, 아니면 모두들 그렇게 여기고 싶은 걸까. 1826년 12월, 죽기 석 달 전 베토벤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누구나 서로 다른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베토벤은 무슨 실수를 한 걸까.

* 김순정 『눈의 여왕』(8월24일 서초문화예술회관)
서초문화예술회관 로비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현장매표매진 안내가 붙었고 ‘왜 표를 안파냐’는 고성도 들린다. 관객은 주로 지역주민. 아이들과 엄마, 학생, 나이든 분까지 각양각색. 구청의 지원으로 구민은 달랑 천원의 입장료. 지나치게 싼 가격 때문일까. 객석에는 오히려 빈자리가 눈에 띈다. 유치원아이들은 앉아서는 시야가 가리니 서서보기도 한다. 보조방석이 준비 안 된 모양.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오케스트라였다. 아니, 전문공연장도 아니고 프로발레단도 아니고, 오케스트라라니? 국립이나 유니버설도 녹음 틀어놓고 춤추는 형편인데? 그러나 그 효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절대 MR에서 느낄 수 없는 현장감과 박진감은 연주 수준과 관계없이 멋진 것이었다. 선곡은 ‘눈의 여왕’ 답게 핀란드, 러시아 음악들로 편집 편곡되어 연주되었다. MR과 라이브 연주는 대략 35:65 정도의 비율. 전곡 라이브연주보다 더 효과적이다. 음악에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장면이 바뀌고 MR과 라이브가 서로 교체되는 지점에서 자연스럽고 깔끔한 연출이 돋보이고, 지휘자의 실력과 노력이 들린다.
어린이 출연자들의 깜찍함과 미모는 객석의 탄성을 끌어냈다. 연기력이 남다른 아이들이다. 카이 역과 게르다 역은 긴장보다 오히려 즐기는 듯 보인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보여준 꽃정원의 군무는 인상적이다. 의상에도 신경을 많이 쓴 듯. 지겨울 틈 없이 보는 즐거움이 있다. 산적 딸의 익살스런 춤도 재미있고 공주도 여왕도 모두 제 역할을 잘해주었다.
즐겁고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좁은 연주장(700석)에서 트럼펫이 울고 아이도 울고, 꼬마들은 서서 깡총거리고, 옆자리 사모님들의 ‘잘한다, 이쁘다, 몸매가 그대로’ 등등 끝없는 수다까지. 그런데 오히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레타(cameretta)와 카메라타(camerata)가 헷갈린 적이 있었다. 「라보엠」의 미미가 자기를 소개할 때(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 나오는 ‘카메레타’는 camera(방)에 etta가 붙어서 작은방이라는 거고, camera에 ta가 붙은 거는 한방에서 같이 지낸 친구, 동지라는 의미. 16세기 피렌체에서 ‘카메라타’라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고안해낸 ‘오페라’ 라는 것이 베니스에 소개되자 업자들은 돈냄새를 맡고 제작에 열을 올렸는데 당시 오페라 극장의 분위기라는 것은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노래 따라하고, 음식 먹다가 중간에 나가버리는 그런 거였다고 한다. 한 오페라 애호가는 자신의 가장 인상적인 오페라 체험은 어떤 이태리 시골 극장에서의 것인데, 옆자리의 여성이 뜨개질을 하며 나오는 노래를 다 따라 하는 것이었다고. 즉 공연이, 음악이, 노래가, 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즐기는 가까운 것일 때가 최고의 것이며, 그래야 한다는 것. 그래서 서초문화예술회관에서의 공연관람은 해질녁 동네 마실 나와서 즐기는 것 같은 그런 즐거운 것이었다.

* 김윤정 『인터뷰』(8월3~5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몇 번은 소설을 읽다 문장 안에서 작자와 동화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사람의 내밀함이 속속 느껴져서 이러면 안 되지, 마음을 다독이다가, 어쩌면 내가 너보다 더 너의 세밀함을 더 느낀다고 말해주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그건 그저 나의 환상일 뿐일 테니. 그런데 이번에는 무대에서 한 여성의 내면고백을 보았다.
김윤정은 이제 50세. 백여 년 전만해도 인생 오십세였으니, 다 살아버린듯한 느낌과 더불어 백세 시대를 맞아 반토막 났지만 살날이 좀 남은, 한번쯤 정리가 필요한 나이가 된 걸까. 김윤정은 자신의 인생 얘기를 털어 놓는 것인데, 사실 서울 어느 구석에서도 중년의 흘러간 인생 얘기를 들어주는 곳은 없다. 모두들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지만 말이다. 예술가란 이런 면에서는 좋은 직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한 시간 동안 자기얘기 실컷하고 박수 받는 직업 - 예술가!
작품은 연기와 연출이 좋다. 따라서 관객의 집중도가 높다. 한 구석 대충 넘어간 곳이 없다.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따라서 왜 그랬을까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김윤정은 무대에다가 8개의 오브제를 배치했다 - 큰집, 작은 의자, 거울, 분홍 원피스, 양동이, 유리물병, 반짝이 천, 빨간 작은집.
시작하면 걸어나와 무대 왼쪽 위 큰집 안 작은 의자에 앉는다. 마이크를 들고 준비 되었다 말하자, 녹음된 질문이 나오고 대답도 하고 말 대신 춤을 추기도하고 책도 소리내 읽고 영상도 보여준다.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는 걸까. 이런 질문도 있었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가’ ‘과거에서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는 물을 머리에 세 번 들이붓고, 또 무대 가운데 반짝이는 러그를 깔아 놓고는 떼굴떼굴 구르고 뒤집어쓰고 푸닥거리. 이젠 하고 싶은 것 다한 걸까. 옷갈아 입고 왼편 큰집을 끌고 나와 그 안에서 춤을 춘다.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윽고 모든 흩어진 물건들을 집안에 정리한다. 빨간집만 빼고.
그러나 최후의 질문과 답은 찾지 못한 모양. 무대 오른편 앞에 있는 빨간 작은집은 건드리지도 않고 두고 들어가 버린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그냥 있다. 들어갈 때도 멈칫 하는 김윤정. 줄줄이 다 쏟아 놓았지만 진짜 비밀은 말하지 않은 듯. 아님 그걸 모르는 듯. 하지만 그건 모르는 체 버려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소설가 이인성이 「한없이 낮은 숨결」에서 그렇게 마지막 숨겨놓은 그 진술을 요구했지만 실패하듯, 김윤정도 빨간집의 미스테리를 풀지 못했다. 아님 관객에게 퀴즈를 준 것일지도.

* 밝넝쿨 『댄스를 부탁해 5』(6월29일~7월1일 성수아트홀)
관객의 호응이 좋다. 전형적인 무용작품이라기 보다는 표면적으로 연극 쪽으로 무게 중심이동.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몸에 대해 말하는 무용작품. 하지만 연극으로 부르든 현대무용으로 부르든 관객입장에서는 문제 될 건 하나도 없다. 관객의 반응 역시 몸의 움직임보다는 연극적이고 코믹한 곳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중반부의 밝넝쿨의 솔로는 자신이 아직 댄서로서 자신만만함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먼저 무대에서 세 가지 것을 보여 주었다. 프로젝터 화면을 통한 활자. 이건 생각이다. 배우의 발화. 이건 말하는 것. 그리고 몸이 움직이는 것.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이 세 가지가 조화롭게 합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뭐가 되는가. 작품에선 그건 ‘고릴라’라고 말한다. 작품 마지막의 고릴라는 ‘몸’과 ‘몸 아닌 것’의 부조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고릴라와 대화 할 수 없기에.
배우들이 한 명씩 나와서 자신이 공연장 오기까지의 과정을 둘둘 말린 발광하는 전선을 풀면서 ‘복기’ 한다. “저는요, 릴라인데요, 점심에 라면먹구요, 참, 구파발에 살아요, 전철을 세 번 갈아타구요, 전철 안에선 사람구경하구요…” 이런식의 일상적이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얘기를 전선을 풀며 주절주절하는거다. 이 과정은 무대를, 작품을, 배우를 먼 곳에서 불러와 관객 옆에 앉힌다. 별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구불구불 작은 빛을 내며 여기로 모여들었어요. 함께 모이니 좀 더 밝은 빛을 냅니다. 그걸 봐주세요.” 이런 생각도 든다. 관객들 역시 여기저기서 반짝거리며 이곳으로 왔을터. 무대에서 말하듯이 모두 빛을 내며 소복히 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고릴라댄스를 보며 재미 속에서 의문을 가졌다면 작품은 성공! 밝넝쿨은 당분간 이 주제를 계속 연구 할 듯. 또 다른 버전의 고릴라를 기대한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