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7일 인쇄
2018년 9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9월호 통권 511호 |2019년 9월 21일 토요일|
 

국악살롱

 

경아대를 개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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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尹重剛)(국악평론)

마음이 아프다. 경아대(景雅臺)는 오래도록 철망 안에 존재한다.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한다. 인천국악의 산실(産室)인 경아대의 현재 모습이다. 1960년대 초반, 인천에서 전통예술을 가르치고 배울 제대로 된 공간이 없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국악협회’와 같은 역할을 할 공간이 필요했다. 1962년 11월2일 오전11시, ‘경아대’ 기공식을 하게 된다. 당시 50만 원을 들어서 건물을 짓게 되는데, 시비와 찬조비가 합쳐졌다. 당시 ‘인천의 국악인’의 성금이 ‘찬조비’가 되었다. 처음에는 ‘경악원’이라고 하고자 했던 것 같은데, 이를 통해서 경아대가 ‘국악’과 밀접했다는 걸 더 잘 알게 된다.
1963년 2월27일 오전11시, 당시 인천시장 류승원(柳承源, 1921~1984)이 현판을 달았다. ‘경아대’라는 한자는 박세림(朴世霖, 1924~1975)으로 국전 출신의 서예가로, 인천지역의 문화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다. 경아대는 ‘한국국악협회 인천지회’의 장소로서 역할을 하면서, 인천의 국악과 무용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960년대 후반, 경아대에선 오후가 되면, 부채춤, 장구춤, 삼고무, 오고무, 열두발상모를 연습했다. 율목공원에 놀러온 어른과 아이에게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경아대가 이렇듯 연습의 공간이라면, 인천시민회관(현, 인성여고 체육관)은 실연의 장소였다. 인천의 국악을 발전시킨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1960년대 중반, 인천의 한국무용은 전국무용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경아대는 이우구락부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 모이는 정악원이 있는 것처럼, 인천에서도 그런 공간을 필요로 했다. 중간의 여러 과정이 있으나, 경아대가 생김으로서 인천의 정악(正樂)을 계속 이어가는 공간이 된 것이다.
경아대는 사십여 평 규모의 잘 지어진 한옥이다. 한옥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사람이 살수록 오래도록 유지되는 공간이다. 한때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한옥을 외부인이 못 들어가도록 닫아 놓았던 시절이 있다. 지금의 ‘경아대’처럼 말이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궁궐을 비롯해서 모든 한옥공간을 개방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인천의 경아대는 거의 늘 닫혀 있을까? 경아대가 폐쇄된 후, 점차 역사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문화공간적인 의미에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은 인천의 국악인조차 경아대를 잘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오래도록 저렇게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아대 앞 관리사무소는 마치 초소처럼 존재한다. 경아대가 세워질 때, 이런 건물은 없었다. 인천시 중구청은 경아대를 잘 보존 및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경아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국악이 존재한 공간이다. 새벽에는 시조창과 단소소리가 들렸던 공간이다. 한 때는 그 공간에서 풍물도 치고 열두발상모까지 돌렸던 공간이다. 인천시 중구에는, 해방이후 인천문화를 지탱한 많은 문화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그나마 존재하는 경아대를 저렇게 폐쇄적 공간을 내 둘 것인가? 닫힌 경아대의 문을 열고, 젊은 국악인들의 공간으로 만들어주길 바란다. 인천의 국악을 새롭게 이어갈 공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