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8일 인쇄
2019년 4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9년 4월호 통권 518호 |2019년 11월 16일 토요일|
 

춤산책

 

이름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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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李東祐)(춤평론)

“태정태세문단세….”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 중 하나가 이 조선 왕들의 묘호(廟號)를 휘(諱)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묘호란 왕의 사후에 붙여진 호이며, 휘란 왕의 이름이다.
조선의 왕들의 휘는 짓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고귀한 왕들을 일반 백성들과 구분을 짓기 위해서다. 백성들의 이름에 주로 쓰이는 한자를 피해 짓느라 ‘이런 한자가 다 있었어?’라고 할 만한 한자들만 골라 썼거나 아예 글자를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휘는 도(), 성종은 혈(), 연산군은 융(), 고종은 형() 등으로 음은 평범할 진 모르겠으나, 그 획은 남다른 것이었으며, 휘 속에 담긴 의미는 기쁨, 행복 등 여느 백성들이 바라는 인생관을 이름 석 자에 담은 것과 같이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되 대부분 외자라는 점이 특이 사항이다. 왕이 다스리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특히 유교국가에서 백성들이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중벌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잘못 써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양반들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왕의 휘를 꿰고 있어야 했다 한다.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좋은 부분보다는 나쁜 쪽에 더 눈길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경스러운 글에 왕의 이름으로 쓰인 한자가 들어간다면 그것이 신성한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왕을 생각할 때마다 쉬이 이상한 방향으로 연상할 수도 있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우, 절대 통치자와 이름이 같을 때, 조선의 왕들과는 달리 인민들이 자신의 이름을 개명해야 한다고 한다. 독재국가이기에 가능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좋게 보자면 절대자와 동명이 될 경우 이를 악용할 가능성도 훨씬 높을 수 있기 때문이라 말 할 수도 있겠다. 북한이라는 공산사회에서 조선시대를 비난하는 이유가 봉건적 사회였기 때문이어서라고는 하지만, 다수의 백성의 이름을 강제로 바꾸게 하는 것 보다 절대자 한 사람이 바꾸는 것이 훨씬 수월한 일이기에 국민을 생각하는 큰 차이가 보인다.

내가 노력해서 유명한 인물이 되는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러한 인물과 이름이 같다는 것 자체로도 영광스러울 만한 일이다. 이는 그 사람처럼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게 할 자극이 되기도 하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바람이나 사주에 따라 이름을 짓기도 하지만 평소 흠모하는 인물의 이름을 자식에게 붙여줌으로써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아무도 흉악한 사람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부모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가장 난처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이름 때문에 동명이인에 의해 한순간에 웃음꺼리로 전락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 중에는 중대 범죄자뿐만아니라 부패한 정치인, 추문이 끊이지 않는 연예인 등과 같은 공인 (公人)들도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 훌륭한 인물로 살다 자기 이름을 명예롭게 남기고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결과만 생각할 뿐 결과를 이루기 위한 그 과정 과정들은 가볍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 때문에 명예로운 이름이 한순간에 치욕적인 이름으로 전락하는 인물들이 더러 생긴다. 조선의 왕들의 휘가 백성들 이름과 섞이지 않는다고 그들 모두가 거룩했던 것은 아니다. 세종대왕, 성종도 있었지만 연산군, 선조 같은 이들도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은 자신이 평소 존경하던 정치인의 이름을 아들 이름으로 똑같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뒤돌아 생각하면 참 무모한 분이다 싶지만 그 정치인은 다행히 별 스캔들 없이 훌륭하게 소원성취를 하다 가신 분이기에 다행스러웠지만 보통 정치인처럼 하루아침에 평판이 뒤바뀌는 이들의 이름과 같다는 것은 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 사람이 내가 안다고 생각한 그 인격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눈 덮인 들판을 걷더라도 함부로 걷지 마라.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언어는 논리가 아니라 감성이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하면서 맷돌 손잡이를 생각하거나 “상상 한다”면서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의 느낌만 있을 뿐이다. 사람이름도 마찬가지다. 한국과는 달리 성씨가 이름보다 다양해서, 누군가의 성이 스펠이 달라도 발음은 똑같은 ‘히틀러’라도 내 앞의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그 옛날의 독재자를 연상하면서 덮어놓고 상대방을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 같은 일이 생길 경우 성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니 이 얼마나 큰 민폐가 될 것인가. 내가 왕이라면 내가 이름을 바꾸든, 내 이름을 아무도 못쓰게 하든 어떻게든 하겠지만 함께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이상 서로 잘 되는 수밖에 없다. 근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다양한 위치에서 동명이인들조차 죽고 싶을 만큼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실추시킨 자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좋은 평판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겠지만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자랑스러워지는 인생으로 살고 싶은 것은 모두의 마음이 아닐까. 어떤 가치의 인간으로 이름을 현세이든 후세이든 남기고 싶은지 한 번 쯤 생각해봐야 할 4월이다.
잔인한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