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8일 인쇄
2019년 4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9년 4월호 통권 518호 |2019년 11월 16일 토요일|
 

역사살롱

 

원균에 대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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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문(朴赫文)(소설가)

임진왜란 후 조선정부의 공신발표. 일본과의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선무공신은 18명인데 반해 임금의 의주 피신에 공을 세웠던 이는 무려 86명이나 되었다. 임진왜란이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군 덕분이고 조선군은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선조의 생각 때문이었다. 일본 육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데 가장 크게 공을 세운 의병대장 곽재우도 공신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탁상행정이 얼마나 부당한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무 1등 공신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 김시민 장군보다 한 등급 위에 원균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를 바꿀 만큼의 혁명적 인물이었다. 전함끼리 부딪쳐서 접전을 벌이는 당대의 전술을 따르지 않았다. 지리적 이점과 날씨 등을 치밀히 계산하였다. 회전력이 좋은 판옥선과 돌격형인 거북선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당한 거리에서 포사격을 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을 채택했다. 이 결과 아군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었고 적함의 피해는 매우 컸다.
원균은 용감무쌍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당시 일본 함정은 삼나무로, 조선의 전함은 소나무로 만들었다. 부딪치면 당연히 삼나무가 먼저 부서진다. 원균은 이를 이용했다. 소위 당파(撞破)전술을 사용하여 적의 배에 강하게 부딪친 후 적의 배를 침몰시키거나 적의 배로 옮겨가 육박전을 벌이는 전술을 택했다. 적군의 피해도 컸지만 아군의 피해도 컸다.
원균이 볼 때 이순신은 군인답지 않다고 여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기는 피를 흘리며 싸우는데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공은 자신보다 훨씬 더 높게 나왔으니 시기를 할만 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 부산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은 일본군에게 전멸 당하였고 다음으로 기세등등한 왜군을 맞이한 사람은 경사우수사 원균이었다. 그는 일본군과의 첫 싸움에서 패배한 후에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의 지원으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으니 그의 마음은 찹찹했을 것이다. 객관적 사실은 옥포해전, 합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서 원균은 이순신과 함께 일본 해군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유재란 때 발생했다. 다시 조선을 공격한 일본군은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부산포에서 가득도와 칠천량 등에 이르는 해로를 확보하고 근처의 육지에 육군을 배치하여 조선수군에 대비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에게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곳을 공격하는 것은 범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꼴이라 이를 거부하고 견내량 너머에서 적과 싸울 준비를 한다. 이는 어명을 어기는 일이었다. 결국 이순신은 삭탈관직 당하여 한양으로 끌려간다. 대신 그 명령은 원균에게 떨어진다. 이순신과 함께 많은 전투를 치렀던 원균도 상황을 파악한 후 불복한다. 이에 권율 장군은 그를 불러 곤장을 때린다. 원균은 결국 명령에 복종하여 적진으로 들어간다. 결론은 수륙 양공작전을 펼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그도 죽임을 맞이한다. 원균, 그는 명령에 죽고 사는 자존심 많고 용감한 군인이라는 것이 올바른 평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