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8일 인쇄
2019년 4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9년 4월호 통권 518호 |2019년 11월 16일 토요일|
 

방송살롱

 

마지막 무관생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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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선(安平善)(방송평론)

「MBC 스페셜」 3·1절 100주년 특집으로 대한제국의 청년 무관생도들이 일제의 조국 침탈에 분노하고 고뇌하다가 운명의 기로에서 갈라서고 다시 또 갈라지는 역사의 한 모습을 기록했다.
100여 년 전 20세 안팎의 대한제국 청년 무관생도 4명의 인생부침, 각각의 출발에서 종말까지를 객관적으로 구성한 의미 있는 특집이었다. 1부 ‘기억하라, 요코하마!’ 2부 ‘죽어도 몸이 썩지 않는다’.(방송 2019.2.25~3.1)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1907년 육군무관학교 해산칙령으로 육군이 해산된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한일합방의 파장을 접하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한 생도 김경천 홍사익 지청천 이응준이 아오야마 묘지에서 박유굉 묘에 참배하고, 김경천 선배의 발의로 피의 맹서를 한다. 암호명은 ‘기억하라 요코하마’.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민족자결운동, 3·1만세운동은 무관생도들의 결심을 폭발시켰다. 그러나 1차는 갈렸다. 김경천 지청천은 자퇴하고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홍사익 이응준은 때를 기다리며 힘을 더 기르겠다고 남았다. 그러면서 계급은 올라가고, 김경천의 엽서가 도착했을 때 이응준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고뇌 중), 홍사익이 육군대학을 마치고 만주 관동군사령부에 부임했을 때 지청천이 보낸 “요코하마, 이제는 조국의 품으로”에는 ‘빛을 잃었다고’ 자포자기한 듯한 전언.
우쓰노미야다로 조선육군사령관의 회유는 더욱 기세를 올렸다. 김경천은 연해주에서 고려의병대를 결성하여 백마 탄 대장으로 맹렬한 투쟁을 지휘하고,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 독립투사들을 이끌고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한다. 마침내 광복군 총사령관에 부임하여 국내 진군 결전의 날을 준비한다. 홍사익은 마닐라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하고, 이응준은 원산에 있는 부대로 이동해온다.
제2차 세계대전이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 한국은 광복을 맞는다. 미처 국가독립의 준비를 갖추기 전에 남북이 분단되고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치하에 들어간다.
대한임시정부는 전쟁말엽에 대일선전포고도 발표했으나 정부차원이 아니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마지막 무관생도 4명의 가는 길은 어디로 열렸을까….
김경천은 혁혁한 투쟁을 벌이는 중에 소련당국이 일본의 밀정 협의로, 인민의 적으로 몰아서 강제노동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로 부대에서 탈출하여 귀가했다. 북한의 소련군과 대치 중인 미군정은 이응준에게 건군의 초석으로 요청,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조선임시군사위원장, 대한민국 육군총사령관에 올랐고, 장관까지 지냈다.
지청천은 광복군을 규합하느라 1946년 1월에 늦게 귀국함으로써 창군의 주도권을 놓쳤고, 대동청년당을 조직했다. 홍사익은 마닐라군사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1946년 9월 26일 처형(56세), 야스쿠니신사에, 이응준은 친일파 명단에 수록. 지청천은 현충원에 봉안되었고, 김경천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인생무상. 네 사람이 한 길로 떠나서, 네 길로 갈라져 갔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한국인 영령 21,812위가 합사되었다. 기획 조준묵, 글 최미해, 연출 장형원 송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