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8일 인쇄
2019년 4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9년 4월호 통권 518호 |2019년 9월 22일 일요일|
 

춤 스크랩북

 

강인하셨던 우리 엄마
- 어머니, 나의 어머니




조동화(무용평론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된다. 그런데 그 지난 세월이 아주 오래전의 일 같게도 느껴지고, 도 바로 엊그제 일처럼도 느껴진다. 어머니가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어려서 부르던 그대로 어머니를 ‘엄마’로 불렀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이 ‘엄마’의 호칭을 ‘어머니’로 바꿔야겠다고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왜 그런지 그것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라고 하면 벌서 우리 애절한 모자의 친근감이 없어져버리는 듯한 느낌을 어찌할 수 없어서였다.
이 감정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지금도 ‘엄마!’ 하고 혼자 불러보면 진짜 내 어머니의 다정함이 떠오르지만 그 밖의 호칭으로는 내 어머니의 참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다. 늙어 죽을 때까지 나는 ‘엄마’ 앞에서 젖 빨 때의 내 어린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 어머니(韓逢春)는 함흥 아래 본궁(本宮)이란 곳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서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톡’에서 성장, 그곳에서 우리 아버지와 만나 결혼하셨다. 외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조선 사람을 상대로 하는 편의점 같은 그런 장사를 하셨는데 그 장사가 잘 되어 돈도 많이 모았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김치, 떡에서부터 옷, 버선은 물론 고국에서 오는 편지를 전달하고, 글 쓸 줄 모르는 사람의 대필을 해주고, 그들이 번 돈을 고국으로 보내고, 환전해주고, 오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고국에서 온 소포를 전달해주고… 하는 그런 일이었다. 따라서 외할아버지는 많은 조선 젊은이를 고용하셨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도 처음 그런 많은 젊은 일꾼 중의 한 사람으로 외할아버지 밑에서 일하셨다. 그러면서 실력을 인정받고 신용을 얻어 일꾼관리로, 그리고 일체의 일을 돌보게 되면서 마침내 사위로 선택됐다. 사실 외국 땅에서 나이 찬 딸을 시집보낼 마땅한 조선 청년을 찾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뜨내기로 러시아 땅으로 흘러든 우리 아버지, 그렇지만 중국말도, 일본말도, 러시아말도 능통했고 글도 잘 쓰셨으니까 외할아버지의 눈에 드신 것이다.
아버지는 장손이어서 결혼하자 이내 어머니를 고향인 정평(定平)으로 혼자 나가게 하여 시집살이를 시키셨다. 허나 곧 따라 나오기로 한 아버지가 일 년 넘도록 나오시지 않자 어머니는 단신 넓은 러시아 땅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나는 어머니한테서 이때의 이야기를 열 번 스무 번도 더 들었다.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억세고 용감하고 참을성 있었는가를 알게 되는 대목은 바로 여기서이다.
러시아 혁명이 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지막 어선을 타고 청진으로 나오셨고, 아버지의 일자리가 회령에 생겨서 결국 나는 회령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셨으나 예배당에서 하는 성경학원에서 한글과 구구단을 깨우쳐 후일 아버지가 위장병으로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그 지식으로 장사를 하여 우리 네 남매를 중학교까지 공부시켰고 또 살만한 집도 마련하셨다.
그리고 해방이 되어 서울에 오셔서 우리 두 형제를 대학까지 공부시켜주셨다. 강인한 우리 엄마, 그 엄마는 91세로 세상을 뜨셨지만 그때까지 그리고 지금 역시 우리는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들로 살고 있다. 죄송할 따름이다.

전력문화, 1993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