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8일 인쇄
2019년 4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9년 4월호 통권 518호 |2019년 5월 23일 목요일|
 

춤 스크랩북

 

‘비슬나무’에 새겨 놓은 소년시절…
- 가고 싶은 故鄕山川




趙東華(월간 춤 발행인)

咸北 會寧(함북 회령)
연어는 넓고 깊고 짠 바다에서 컸어도 태어난 실개천의 그 민물 情緖(정서)를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한다.
내가 따뜻한 남쪽 땅에 내려와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사귀며 50년을 살면서도 아직껏 어느 하루를 고향을 잊고 산 적은 없었다. 인간이란 것도 한 마리의 연어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나 딴으로는 그래도 ‘서울말’을 한답시고 하는데 상대방에서 금방 “선생 고향, 함경도 어디세요” 로 대접해오는 걸…. 내 어찌 고향과의 숙명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 가 말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고향에서의 같은 꿈을 몇십 몇백 번 반복하여 꾸었다. 장소도 꼭 같은 곳. 우리 동리라고 하는 그런 세 갈래 모퉁이길… 나는 지금 서울에서 고향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내 집을 찾아가는… 그런 조급한 입장.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힘들게 우리 집이라고 하는 곳을 찾았는데… 어머니와 동생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피난 가고… 그 집에는 나를 잡으려는 적군들이 기다리고… 그래서 나는 영화 람보처럼 그쪽으로 향하여 보기 좋게 기관단총을 갈겨대면서 뒷걸음질로 골목을 빠져나오는… 그런 식의 장렬한 꿈.
두만강변 會寧(회령) 내 고향은 눈이 녹아내리면서 벌써 살구꽃 피는… 그런 화창하고 정다운 곳인데, 웬일로 꿈속의 고향은 그처럼 살벌하고 음산하고 조급하기만 했을까. 그런데 잠이 깨면 이상하게도 실컷 울고 난 후 같은 그런 가슴이 시원히 열리는 충족감을 맛보는 게 사실이다.
이제 통일이 되어 내가 보란 듯이 나의 멋진 자동차를 몰고 고향으로 찾아간다고 하여도, 나를 알아서 맞아줄 사람도, 내가 찾아가 자랑할 친구도 친척도 그곳엔 없을 것이니 쓸쓸하기 그지없다.
우리 고향엔 비슬나무(楡木)가 많았다. 4월께면 비슬나무 작은 꽃이 피고 속옷(內衣) 단추 정도 크기의 둥근 날개 있는 씨는 초여름에 익어서 학교 운동장이나 길가에 누렇게 떨어져 깔렸었다. 그런데 이 비슬나무를 서울서 좀처럼 보기가 힘들었다. 사실 이 나무는 정원수도 아니고 목재로도 별 쓸모없으니 깍쟁이 서울에서 보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헌데 지난봄 장충동에 있는 교회계단 위에 비슬나무의 씨가 떨어져 깔려 있었다. 반가웠다. 걸음을 멈추고 담 위를 쳐다보았다. 굉장히 큰 나뭇가지가 아득히 높이 있었다. 우리 고향의 비슬나무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나는 계단에 깔린 씨를 긁어모아 한 움큼 잡았다. 그 싱그러운 촉감의 무게… 나는 잠시 古稀(고희)의 소년이 되어 고향의 향수에 젖었었다.
고향 우리 집 앞 바로 큰길 건너 언덕에 會福寺(회복사)라는 일본 절당이 있었다. 그 경내엔 크고 우람한 비슬나무가 많았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 나무를 타고 올라가 놀았었다. 특히 중학교 시험에 낙방한 그 슬픈 한해 여름과 가을은 꼬박 그 나무 위에서 살았었다.
나무 위에 있으면 친구들에게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고, 뭔가 씁쓸하고 지루한 세상을 도피하는 것 같은 그런 생각에서였을지 모른다. 어떻든 나무 위는 마치 녹색의 큰 천막 속에 들어간 것처럼 높고 넓은 또 하나의 공간이 펼쳐진다. 그것도 하나의 세계, 나는 아직도 그 속의 정기와 즐거움과 안정을 기억한다.
나무마다 편히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가지를 나는 알고 있었다. 비슬나무에는 그런 멋진 가지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거기에 앉아서 하모니카도 많이 불었다. ‘오빠생각’이나 ‘돌배나무’ 같은 그런 슬픈 곡이 그때의 나의 레퍼토리였다. 비슬나무에 올라가 앉으면 왜 그리도 외롭고 슬펐는지. 아직도 고향 비슬나무엔 나의 그때의 슬픔이 있을까. 보고 싶어진다. 그 나무들은 지금 얼마나 더 컸을까.
찾아볼 사람이 없는 고향이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비슬나무 숲이 있는 그 속, 그 고향산천이 거기에 있는데 어찌 찾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유신문, 1993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