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올 여름 우리는 짧은 일정 4박5일로 싱가포르를 다녀왔다. 필자와 김수정, 김재훈, 정지혜, 정수동은 「2017 문화올림픽」의 일환으로 국제레지던시 『첩첩산중×평창』을 통해 만났다. 공연예술분야의 국내 아티스트들은 이후 잔잔한 교류와 협력을 통해 관계를 돈독히 이어나갔고, 올해 초 시각분야의 PD 김수정의 기획을 중심으로 이번 협업이 이루어졌다. 김수정은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의 책임큐레이터 베니니(Vanini Bellarmino)와의 인연으로 이번 퍼포먼스를 공동 기획하였고, 문화예술위원회의 국제교류 기금에 선정되어 작업이 실행되었다.
이 작업은, 1990년대 아시아 각국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의 사회 문화 정치적 변화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는 기획전으로, 국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 초 4개월간 5월4일까지 약4개월간 진행되었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일본국제교류기금아시아센터의 공동주최로 이루어졌다. 참여한 아시아 국립기관은 “어웨이크닝(Awakenings)”이라는 주제를 통해 각 미술관의 큐레이팅에 따라 새로이 배열되는 기획 전시를 갖는다. 국내 과천전시에서는 기획되지 않았지만, 싱가포르 전시의 책임 기획자 베니니는 이강소 작가의 「소멸(선술집)」을 바탕으로 수정에게 함께 퍼포먼스를 기획할 것을 제안했다. 수정은 한국의 아티스트로 필자를 포함한 재훈, 지혜, 수동을 구성해 1970~80년대 당시 이강소와 비슷한 연령대의 아티스트들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해프닝과 가치관을 생성하고, 지금을 살아내는 관람객들을 잇는 접점을 만들고자 하였다.
2019 4월 중순 흐린날 오후 첫 만남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강소의 「소멸(선술집)」을 만났다. 2017년 이후 각자의 시간을 한껏 덧입힌 참여 아티스트들과 대화를 나누며 함께 하는 의미 자체가 뜻깊고 감사함을 느꼈다. 곧 우리가 있게 될 공간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벗고, 현실과 작업 어딘가에 있는 본인의 위치를 이강소 작가를 나침반 삼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인 협업의 의지, 개념의 충돌보다 각각의 욕구가 좀 더 시급했다.
매주 혹은 격주의 야간 리허설 그리고 들린 선술집 각자의 개별 리서치와 몇 차례의 미팅이 진행된 후 우리는 잼 형식의 리허설을 진행해본다. 성향과 취향을 어느 정도 알고 이해하기에 충실하고 성실한 예술가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두들 날이 서 있고 촉수가 건드려지고 닿아있음을 증명하듯 반응을 보인다. 또 누군가의 입맛을 염두에 둔 작업이 아니기에, 각각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상태가 중요한 그것이 우리를 지속하는 힘이라는 믿음을 쌓아간다. 순간 낯설기도 하지만 생각의 주머니가 모여서 어렴풋이 우리의 공통의 키워드 ‘소멸’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기울인다.
무엇을 할 것인가 수동은 과감히 자신의 몸을 『소멸(선술집)』에 있을 법한 사물(의자, 젓가락, 술잔 등)로 체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지혜는 당시의 시대적 상징과 그 시간성을 대변하는 김추자의 음악에 사진이란 미디어가 선택적으로 채집하는 미시적 순간을 실시간으로 전달하여 관객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았다. 보람은 그곳에 두는 몸이 감각하는 순간을 텍스트나 그림으로 남겨 소멸하는 시간을 단서로 남기는 퍼포먼스를 실행하고자 하였다. 재훈은 각 퍼포머들의 주제와 키워드에 맞는 소리와 음악을 구성해 퍼포먼스가 자연스럽게 그 행위가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완성시켰다. 그리고, 수정은 우리의 행위를 명확한 문장으로 소개하는 간결한 프레젠테이션과 퍼포먼스 중간에 기술적 호환이 가능한 작업의 시스템을 완결시켰다.
싱가포르 내셔널갤러리로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바로 내셔널 갤러리로 향한다. 아직 공간과의 교감을 나누지 못한 채 낯선 환영인사와 뜻밖의 환대에 어리둥절하며 결정되지 않은 것들을 고민하는 상황에 놓인다. 시간이 지나 공기를 맛보며 공간을 눈에 들이기 시작하자 하나하나 선택되고 해결된다.
이강소의 「소멸(선술집)」은 전시실 내부가 아닌 계단과 문이 연결되는 큰 창문이 눈길을 끄는 공간에 있었다. 국경일 행사로 창밖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눈에 짐작할 수 있는 행사준비가 한창이었다. 불빛도 노랫소리도 압도적으로 정신 사나웠지만 싱가포르의 공권력과 이를 받아들이는 정서를 살펴봄직 했다. 낯선 곳에 내 몸을 두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지만 여행객이다. 약속된 시간까지 우리는 만날 수 있는 싱가포르를 각자의 방법으로 바쁘게 다녔다. 갤러리가 제공하는 오피셜하지만 진솔한 설명을 통해 어웨이크닝 큐레이팅의 의도, 직시하는 아픔과 문제의식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오프 더 레코드로 갤러리에 드리운 센서십(Censorship)의 그늘의 정도도 알게 되었다. 내셔널 갤러리는 이전에 역사적 상징을 지닌 시청과 대법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곳곳의 공간은 고풍스런 과거와 이 시대를 잘 채집한 현대가 공존하도록 노력하며 자부심을 내뿜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두 번째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어제는 느끼지 못한 공간의 현장성을 느꼈다. 우리의 퍼포먼스에 우호적이지만 꽤 엄격하게 기물들을 대하는 스태프들과의 조율을 통해서… 이곳은 공연장도 아니고 우리나라도 아니라는 것.
우리의 퍼포먼스는 갤러리가 끝나는 시간에 시작된다 선술집이 작동하는 시간은 공식적으로는 갤리러가 문 닫는 시간이다. 아이러니 하지만 준비된 음식들과 음료가 작가의 오브제에 숨을 불어넣는다. 동화에서 마법을 부리는 것 같이. 옛스런 건물내벽과 계단이 사람들로 꽉차면서 마치 궁궐에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쾌활하게 퍼포먼스를 즐겨준 관람객들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기도 그 순간에 푹 빠졌다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왜 그랬는지 궁금해 한다. 가사가 나오는 김추자의 노래가 K-pop인가 궁금해 한다.
우리는 랜드마크 롱바에서 시그니처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을 마시며 땅콩껍질을 바닥에 마음껏 버렸다. 첫날의 퍼포먼스가 조심스러웠기도 하고 즐거웠으며 내일은 무엇을 더 아티스트로서 변화시켜볼 수 있을지.
꼭 하고 싶은 한 가지 일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기 때문에 여행자로서 바쁜 오전 오후를 보낸다. 맛있는 칠리크랩도 찾아 먹고 리틀 인디아에서 무스타파라는 쇼핑몰에서 한껏 쇼핑을 즐긴다. 싱가포르 여행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방법들이 생기고 있었다. 역시, 해가 질 무렵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손님들이 좀 더 많았다. 주말이라 늦게까지 갤러리가 열려있는 날이다. 빽빽하게 선술집 의자와 계단 위에 앉거나 혹은 돌아다니며 이곳을 만끽한다. 우리들의 행위 그리고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자체 그리고 그들이 이 행위에 일부분이라는 사실에 즐거워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앗! 이것이 퍼포먼스의 묘미 아닌가. 어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재훈의 제식 퍼포먼스가 행해진다. 철저하고 꼼꼼한 우리의 뮤지션이 이곳에 메시지를 던지고자, 묵묵하지만 파격적으로 한마디 했다. 우리의 제각각의 소리들을 한방에 압도하는 방점이었다. 퍼포머인 나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으니. 우리는 뒤풀이자리에서 신나게 퍼포먼스의 묘미에 대해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것의 강렬함에 대해. 다음날 오전 우리는 꼭 하고 싶은 일 한 가지씩을 하고 공항으로 모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기획은 김수정이 우리 4명의 아티스트들을 푹신한 길잡이로 서로를 신뢰하기에, 장르간의 협업, 해프닝을 넘어 각 아티스트들의 관심사와 작업 경향을 실험하는 담력과 경험을 쌓았던 기행으로 기억된다. 이전에 기사에서 이강소 작가는 자신을 ‘멍석을 까는 작가’라고 설명하며 관람자들의 세계를 존중하고 필수적인 작용으로 인지하고 적극 수용한다고 읽었다. 그가 깔아놓은 멍석은 꽤 포괄적이고 지속가능했다. 우리도 그 멍석에서 한판 할 수 있었고 수많은 것들이 발생하고 공존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