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7일 인쇄
2019년 12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9년 12월호 통권 526호 |2020년 10월 21일 수요일|
 

춤산책

 

블로킹 - 세상에 나쁜 인간들을 위한 강력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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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李東祐)(춤평론)

“징글벨 징글벨…”

미혼인 남녀들은 추석 때가 되면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결혼에 대한 압박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지만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알아서 짝을 찾고 싶은 갈급함이 생기기도 하겠다. 그래도 평소에 찾지 못한 인연, 무슨 때가 됐다고 번갯불로 콩 구워 먹듯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급한 마음에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인연을 만드는 것은 도박에 가깝다. 황금만능주의와 인성 교육이 희박해지는 각박한 시대로 다다를수록 사람을 사귀는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인간 대신 반려동물을 키우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반려동물 중 특히 인기 있는 동물은 단연 개다. 개는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한 번 주인으로 정한 대상을 쉽게 바꾸지 않는 한결같은 면이 있어서 웬만한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지만 과거에는 견존묘비에 관한 전래동화가 있을 정도로 정서상 고양이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말을 알아먹었는지 못 알아먹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다가 주인을 집사로 여기는 고양이 보다는 사람의 말귀를 더 잘 알아듣고 충직해 보이는 개가 정을 중요시 여기는 한국인들의 정서와 더 부합하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고양이의 기억력은 그리 길지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관점으로 본다면 개에 비해 고양이는 배은망덕한 짐승이라 생각할 만하겠지만 이는 다 인간 위주의 생각일 뿐이다.
개를 반려동물로 키우려는 동기가 반려견 입장에서는 위험한 일이 될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 대신 개를 키우려는 의도는 개를 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용, 즉 “반려”가 아닌, 아직도 예전의 표현식인 “애완”을 목적으로 키우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단지 개가 귀여워 이에 따르는 의무를 생각지 않은 채 개를 입양하려는 마음부터 앞서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2017년 세계 22개국 전체 인구수의 절반 이상이 반려동물을 키우며 22개국 중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수가 가장 적은 한국도 2018년 국내 반려동물 1500만 시대를 열었다고 하는데 과연 반려동물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지고 키우는 사람은 그중 몇 명이나 될까.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세사 밀란의 도그 위스퍼러」는 개 트레이너 세사 밀란이 문제견을 훈련시켜 변화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으로, 2004년 첫 방영을 시작해서 9년 동안 세계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면서 재빨리 한국에서도 교육방송 EBS를 통해 한국의 환경에 맞는 반려견 훈련 프로그램인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일명 ‘세나개’가 2015년 3월 첫 선을 보이며 여기에 출연한 강형욱, 설채현 훈련사도 미국의 세사 밀란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인기 훈련사들이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점은 단지 개 훈련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보다는 인간에게 주는 교훈이 더 크다.
매회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주는 소위 ‘나쁜 개’들이란, 결국 ‘나쁜 사람’들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인간의 학대로 트라우마를 겪은 개, 과잉 애정으로 버릇이 없는 개, 집의 규모와 맞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개, 임의대로 또 다른 반려견을 데리고 와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고는 원인을 모르겠다고 칭얼대는 견주 등 근 4년 여 동안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다. 상처를 주거나 버릇을 잘못 길들이기는 계기는 단순하고 한순간이나 이를 치유시킬 방법은 수학공식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견종의 특성과 개들 하나하나의 천성에 따라 다르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인간에게 접근하는 방법과 크게 차이가 없다. 복잡한 인간에 비해 다른 점이 있다면, 교육방법의 도구로 언제나 첫 번째 단계인 ‘간식’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이 간식이 어떤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희한하게도 마음이 닫힌 반려견들도, 버릇없는 반려견들도 하나같이 간식을 매개체로 교육이 진행되며 그 방법이 대부분 통한다는 것이다. 굳이 인간으로 치면 밥 한 번 사 먹이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반려견 용 간식을 만든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이라도 줘야 할 만큼 간식이란 훈련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필요수단이 되었지만 한 편으론 간식 하나로 마음이 바뀌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데 있어서 개 역시 먹을 것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라는 오해가 생길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블로킹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몸으로 외부자의 공격을 막는다는 뜻으로, 문제견이 인간을 공격하거나 흥분했을 때 몸의 언어를 통해 통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주로 버릇없는 개들에게 쓰이는 방법이다.
문제견에게는 일차로 간식을 주고 마음을 열게 한 뒤, 문제의 행동을 보일 때 거기에 적절한 견주의 반응을 바르고 안정감 있는 몸짓과 매너로 보여주게 되면 개들은 하나같이 거기에 반응을 하고 서서히 변화를 일으킨다. 어떤 면으로는 인간이 제대로 된 몸짓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편의상 말로 다그쳤기 때문에 소통이 불가능 했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블로킹은 방어의 의미도 쓰이지만 무대에서는 언어의 도움 없이 캐릭터의 자세와 태도만으로도 캐릭터의 심리와 상황을 묘사하고 설정하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같이 몸의 언어란 만국 공통어일 뿐만 아니라 동물과도 소통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왜 더 강력한 힘을 갖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개 훈련에 있어서는 방어와 표현, 이 양쪽의 뜻이 함께 쓰여야 하겠지만 블로킹은 인간에게도 이와 동일하게 적용이 가능하다.
몇 달 전, 한 공연장을 찾았다. 내 바로 뒷줄에 어떤 일행들이 열을 지어 앉아있었는데 공연 시작부터 심상치 않아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들은 공연이 시작된 후에도 평소 때의 음성으로 끊임없이 잡담을 나누는 것이었다. 게다가 공연장이 건조하다며 가방에 사탕을 꺼내 포장지를 벗겨내 정답게 권하기까지 하는 소리가 내 귓가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내 앞에 앉은 관객마저 돌아볼 지경이었지만 마치 공연장은 난생 처음인 듯한 그분들이 그런 세련되고 품위 있는 주의를 알아챌 리 없었다. 공연 시작과 동시에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연신, ‘내가 만약 강형욱 씨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되뇌었다. 앞 사람의 머리에 가려 무대 일부가 가려진 채로 보고 있었던 터라 전체 그림을 못 보고 관람하던 중이었다. 나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블로킹의 활용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자마자 바로 뒤에서 떠들던 분들의 음성이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마술과도 같은 이 효과에 나도 신기했지만 내가 화가 난 상태를 그분들도 눈치 챈 것 같았다. 왜냐면 그분들로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뒤로 앉아달라는 말을 전혀 듣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들도 나의 행동에 쉽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나도, 주위 사람들도 나머지 3분의2 분량의 공연을 끝까지 조용히 넓은 시야로 잘 보고 객석을 나섰다. 다행히 뒷좌석의 그분들도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했었는지 깨달았던 같다. 공연이 끝나고 뒤를 돌아보니 그분들이 이미 퇴장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블로킹이 때때로 한마디의 따끔한 말보다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유용함에 감탄했을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는 블로킹의 힘을 일깨워준 강형욱 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그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교육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반려견들이 실수하게 되면 말과 체벌 등의 방법, 즉 사람의 눈높이에서 개들을 혼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입장을 바꾸어보면, 본능에 충실했을 뿐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나를 야단치거나 체벌을 한다면 무척 당혹스러워 스트레스만 쌓여 갈 것이다.
전에 내가 알던 사람도 주위에서는 개를 아주 좋아하는 이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문제유형이었다. 한 번도 개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던 견주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면으로 그의 손을 탄 개마다 문제견으로 변해갔다. 제대로 키운 개들은 언제 봐도 평안하지 않던가.
개를 잘 다룬다고 자처하지만 말로 야단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중 가장 오래 키웠던 개는 말년에 노환에 주인이 옮긴 손독과 비대해진 몸으로 인한 관절염, 치료 후유증으로 눈이 감기지 않는 등 여러 질환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혼자 사는 주인이 직장에 가면 하루 종일 눈을 뜬 채 엎드려만 지냈고, 잘 때도 눈을 감지 못해 결국에는 실명까지 이르러 늘 돌봐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주위 사람들이 그 노령의 개를 위해 안락사도 권유했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며 죽을 때까지 기르겠다고 우겼고 소원대로 그 상태로 오랫동안 데리고 있었지만 막상 견주가 출근 후 그 개는 혼자 눈도 못 감은 채 쓸쓸히 죽었다. 여기에 개에 대한 배려와 역지사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사랑이고 애정인가? 나는 그 과정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이제는 그와 연락을 단절했다. 개에게도 가능한 블로킹이 이런 유형의 사람은 적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견주는 며칠 반짝 울며 지내다 또 다른 개를 입양했다 한다.

한국말 중 ‘개만도 못하다’는 표현이 있다. 한 주인만 섬기고 따르는 개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겠지만 그 의미는 개의 충성심과 의리가 사람보다 나음을 역설적으로, 강한 어감으로 담고 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개는 마음을 닫았으면 닫았지 가식적으로 대하지 못한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는 표현이 있는지만 친구끼리도 가식적으로 서로의 이익에 따라 붙고 떨어질 수 있는 세상이다. 2019년 반려동물 1500만 시대, 반려견 인구 1000만 시대를 맞아 먼 미래에는 ‘그 사람을 알려면 그가 키우는 개를 보라’가 더 정확 할 것 같다.
누구나 의무감 없이 마냥 개를 예뻐만 하고 싶지만 때론 냉정하게 대해야 할 때가 있다. 개들을 훈련시키는 데 있어서의 블로킹은 냉정한 수단이다. 블로킹은 애정을 표현하는 제스처가 아닌, 사람이 개에게 자기가 싫어하는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고 상황에 맞게 행동하도록 절제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과잉 애정과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인 반면, 상대방을 믿음으로 지켜봐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처럼, 블로킹은 스킨십 대신 거리를 둠으로써 궁극적으로 사람과 개가 함께 조화롭게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정성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진심은 통한다고, 놀랍게 개들은 이 블로킹의 의도를 재빨리 습득하고 자신을 변화시킨다. 사람 간의 블로킹도 그렇게 잘 이루어진다면 국회의원들의 몸싸움을 보는 일도 없겠지.

한국, 특히 서울은 높은 인구밀도와 비싼 땅값 때문에 에너지 넘치는 반려견들을 마음껏 뛰놀게 할 만한 여건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말도 안 되는 좁은 공간과 산책이 어려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 일수록 혼자 산다는 이유로, 그저 외롭다는 이유로 반려견을 키우게 된다. 하루 종일 집 안에서 방치시켰다가 잠깐씩 보는 시간을 위해 하나의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물론 정서적, 신체적 질병 치유를 목적으로 새끼 때부터 훈련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닌, 제대로 된 환경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그 안에 무엇을 기른다는 것은, 마치 생활고에 쫓김에도 단지 적적하다는 이유만으로 아기를 입양하려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동물이나 사람을 입양하고 양육한다는 것은 생명을 다루고 그 마음과 영혼까지 책임지는 일이며 일방적인 약자가 절대적인 강자에게 자신의 생명을 위탁하는 숭고한 일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동물을 입양하기 위해서는 아기를 입양하는 것만큼이나 서류 심사가 선행되고 그 자격에 대해 엄격하다. 이제 한국도 서서히 동물 입양의 절차를 까다롭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반려동물을 맡아 키우는 것에 대한 심사는 까다롭게 하면서 인간이 새 생명을 낳아 양육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낳고 보라’는 식으로 관대하다 못해 이 후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방비로 내버려지는 사회제도 - 결혼 전의 애정과 집착은 데이트 폭력이고 결혼 후에는 ‘집안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경찰도 건드리지 못하는 한국의 이상한 정서는 세월이 가도, 가정폭력이 빈번해져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사랑과 애정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하에 가족 내 약자에게 행해지는 정서적 육체적 학대와 폭력에 블로킹 한 번 못써보고 그저 강자의 자비와 운에 맡겨야 하는 가정이 의외로 많다. 인간은 개만도 못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