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7일 인쇄
2019년 12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9년 12월호 통권 526호 |2020년 1월 23일 목요일|
 

역사살롱

 

예송논쟁
-




박혁문(朴赫文)(소설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한심한 정치적 논쟁을 찾으라면 현종 때 벌어졌던 ‘예송논쟁’일 것이다. 발단은 인조부터이다. 병자호란의 수치를 겪은 지 2년 후인 1638년에 마흔네 살의 인조는 15살의 어린 처자와 다시 가례를 올렸다. 그녀가 장렬왕후다. 이 어린 왕후는 아들이 되는 소현세자보다 여덟 살,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인 인선왕후보다는 여섯 살이나 어렸다. 때문에 그녀에게 가장 힘든 것이 상례였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한 후 두 달 만에 죽자 그녀는 궁중의 예법인 오례의에 따라 삼 년 동안 상복을 입고 지내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인 인조가 죽자 또다시 삼 년 상복을 입고 곡을 해야 했다.
삼십이 되기도 전에 청상과부가 된 그녀는 자의대비라는 존호를 받고 궁중의 제일 어른이 되었지만,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소현세자가 죽고 난 뒤 인조는 장자 계승이라는 전통을 깨고 소현세자의 장남인 석철 대신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에 앉혔다. 그가 효종이다. 그는 북벌정책을 펼치면서 그 계획을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맡겼다. 오래지 않아 송시열의 권력은 임금을 능가하게 되었다. 조정은 그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문제는 효종이 죽고 난 뒤에 벌어졌다. 임금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는 궁중 예법인 오례의에 없었기 때문에 예조는 송시열의 눈치를 살폈다. 송시열은 비록 효종이 임금이지만 인조의 차남이었기 때문에 주자가례에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했다. 이것이 눈치만 보고 있던 야당인 남인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비록 차남이긴 하지만 효종은 임금이기 때문에 임금의 상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윤선도가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정통성을 두는 것이라면, 이는 역적 행위라고 몰아붙였다.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효종의 아들 현종은 내심 남인인 윤선도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송시열에 감히 도전을 하지 못해 송시열의 손을 들어주고 윤선도를 귀양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쟁은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끊이지 않았다.
2차 논쟁은 1674년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벌어졌다. 송시열은 지난번과 똑같은 경우라며 왕후가 아닌 둘째 부인의 예법에 따라 자의대비는 9개월 동안 대공복만 입으면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영남의 유생인 도신징이 상소를 올려 또다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삼십 대에 접어든 현종은 지난번과 달리 남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송시열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현종이 죽자 이에 반발했지만, 그는 현종의 아들 숙종에 의해 결국 귀양을 가고 만다. 이로써 예송논쟁은 끝이 난다.
임진왜란 후 국토의 2/3가 황폐해졌고 인구 절반이 죽었으며, 곧 이은 병자호란으로 인구의 15%가 포로로 끌려간 직후부터 벌어진 일이다. 전쟁복구를 위해 애써야 할 시기에 15년 동안 예법 논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웠으니 얼마나 한심한 정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런 송시열은 그의 후학들이 권력을 잡음으로 인해 지금도 송자로 칭송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