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7일 인쇄
2019년 12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9년 12월호 통권 526호 |2020년 10월 21일 수요일|
 

춤 스크랩북

 

시골의 포플러나무에는 나의 외로운 그림자가
- 생활 속의 발견




()

조동화 / 월간 「춤」 발행인. 1922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서울대학 약학과를 졸업했다.
저서로는 「꽃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멀리 서 있는 시골의 무성한 포플러나무에는 후기중학생(後期中學生)이던 나의 외로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 높이 흔들리는 그 포플러나무 가지 위에 펼쳐지는 푸른 하늘과 그 하늘 위의 흰 구름에는 그때의 외로운 영혼이 떠다닌다.
같은 또래의 개구쟁이들은 다들 우리 읍을 떠나 원하는 중학교에 갔었고 자랑스러운 교모를 쓰고 고향에 돌아와 여름방학을 즐겼었는데 후기중학생이 된 나는 교모가 부끄러워서 늘 맨머리로 포플러나무 밑에서 더위를 식혔다. 자전거로 갈 수 있었던 두만강변, 그 포플러나무 숲은 강 아래쪽 나루터가 보이는 구부러진 곳이었다. 두 사람의 사공이 젓는 나룻배는 종일 강을 건너갔다, 왔다 했다. 손님이 가득 실릴 때도 있지만 빛깔 있는 파라솔을 쓴 여자가 혼자 타고 건너올 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젊은 여인의 양산을 보고 슬픔 같은, 외로움 같은 이상한 감정이 되곤 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또 그 숲은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세관원과 만나는 순서까지도 아련히 보이는 그런 거리이기도 했다. 우리 새아재(아저씨의 부인)의 친정도 바로 강 건너 만주 땅이었다. 그래서 친정을 다녀올 때마다 심한 몸수색을 당해서 아재비(아저씨)가 기분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아름답고 조용하게만 보이는 그 나루터도 정작, 후기중학생의 가슴처럼 무언가 사연들이 많았다. 말더듬이에다가 보통학교를 세 번씩이나 전학 다녀야 했던 기차 통학생인 나는 부족한 실력 때문에 후기중학의 입학도 요행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이 덜 들었기 때문에 항상 그 불명예로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 집 길 건너서 제국대학에 다니는 선배 형 집이 있었다. 방학 때마다 그 형도 고향에 돌아왔다. 그 형 집에는 문고판 책도, 레코드도 많아서 나는 그 형에게 자주 갔었다. 방학 한철, 우리 읍내의 대학생들은 그 형 집에 모여들어 바둑을 두고 음악도 듣고 하였기 때문에 나는 초청 받지 않고도 물심부름, 축음기의 바늘갈기 등을 하면서 끼어들 수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월등하게 높은 분위기가 후기중학생에게는 편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형들의 대화나 그들의 모든 행동, 하다못해 금지된 장난들까지도 나에게는 우수한 자만이 누리는 권리처럼 위대하게만 보였다.

2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형 집에 갔더니 툇마루에 대학생 형들과 일본에서 음악대학에 다닌다는 인쇄소집 누나랑 또 그 누나의 다른 친구들이 함께 어울려 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형 집에서는 종종 유학생들을 불러들여 음식을 차리곤 했다. 그날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후기중학생은 하늘과 별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더구나 높은 대학생들의 정식대화로서 별의 이야기가 등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정말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었다.
형들이 손가락으로 별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지만 나는 그 손가락의 연장선상에서 그 별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처음으로 의식하면서 보는 그 밤하늘은 너무도 넒고 멀고 캄캄하였다. ‘지구물리학’이라는 술어도 그날 밤 처음 들었다. ‘지구’니 ‘물리학’이니 하는 단어는 평범한 것인데 그 둘이 합쳐지니까 그렇게도 찬란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 술어의 인상은 마치 둥글게 빛나는 크고 무거운 물체에 화려한 저울대가 걸쳐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장에 유식해져 버린 중학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유식은 행복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불안감과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그 이후 나는 왜 그랬던지 다시 학교에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를 뚜렷하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그런 ‘유식’한 감정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갔다.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서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도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후기중학교를 떠나는 방법 이외의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개학날에 맞춰 집을 떠나야 할 날이 됐을 때 나는 일부러 아픈 척하고 누워버렸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병이 되어 한 달 가까이 앓게 되었다. 개학이 늦은 대학생 형들도 모두 떠나게 되자 나도 주섬주섬 행리(行李)를 챙겨 메고 학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외로웠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전과 같은 부끄러움 때문에 도망 다니는 외로움은 아니었다. 질병과 마찬가지로 어떻든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러한 외로움이었다.
분발하여 4학년 때에 처음 내가 낙방했던 그 전기중학교에 보결시험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나는 그런 정도의 중학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대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병에 걸린 중학생이 된 것이었다.

斗山그룹 198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