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이달의 좌담

김나이 (金나이 / 성균관대학교 교수)
박나훈 (朴羅訓 / 영산대학교 교수)
정재혁 (鄭宰赫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심정민 (沈廷玟 / 춤평론, 사회)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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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 : 8월21일 오후 6시
■ 곳 : 본지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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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특정적 공연에 대한 개념화 작업은 아직도 진행형
심정민 _ 오늘 좌담에서는 ‘장소특정적’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대에 들어서 장소특정적 공연이 조금씩 늘어나더니 요즘엔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소특정적 공연에 대해 제대로 알고 하기보다는, 단순히 극장의 전통적인 무대 형태를 벗어나는 정도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최근에 장소 특정 공연이 언급은 많이 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실현하는 공연은 많지 않으므로 이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좌담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모신 분들의 공통점은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비교적 젊은 교수들이라는 점이고, 또 해외 경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의식하고 섭외한 건 아니지만, 장소특정적 공연에 맞는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분을 찾다 보니 공통점을 가진 분들을 모시게 됐습니다. 우선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박나훈 _ 안녕하세요, 박나훈입니다. 저는 부산 영산대학교 연극과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재혁 _ 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로 있는 정재혁입니다. 2004년부터 2010년 말까지 뉴욕에 있는 ‘트리샤 브라운 무용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컴퍼니 J’라는 무용단의 대표이자 예술감독으로서 개인 무용단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나이 _ 저는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있는 김나이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홍콩공연예술대학교 무용학과에서 교수로 3년 재직하다가 귀국했습니다. 무용교육은 영국과 미국에서 받았습니다. 무용수로는 뉴욕에서 프리랜서로 8년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무용단에서 3년간 무용수로 활동했습니다. 안무가로는 프로젝트 무용단 ‘김나이 무브먼트 콜렉티브(NKMC)’ 로 활동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심정민 _ 오늘 논의를 크게 3가지 파트로 나눠서 해보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장소 특정형 공연의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두 번째는 해외 주요 사례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는 국내 사례와 국내에서 고려할 문제들, 잘못된 인식 등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장소특정적 공연의 개념입니다. 초기에는 정형화된 극장무대에서 벗어나서 장소 제한 없이 다양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공연하는 것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점차 장소특정적 공연으로 발전해 나간 거죠.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그 시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단순히 극장에서 탈피해서 다른 공간으로 나아간 것으로부터 한 발자국 더 내디디면 공연하는 장소 자체가 주체가 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다. 즉 그 장소만의 역사적, 사회적 측면, 그러니까 역사성이나 사회적 의미 같은 것들을 안무에 담아낼 수도 있습니다. 공연이 특정 장소에서 이뤄질 경우 그 장소만의 특수성을 내재한 공연을 의미하는 거죠. 이런 공연은 사실상 공간에 새로운 의미와 생기를 부여할 뿐 아니라, 대중이나 지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좀 더 용이하게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이끄는 측면도 있어요. 그러니까 커뮤니티 요소도 가미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장소특정적 공연은 광범위해 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극장에서 탈피한다는 것에 초점을 많이 맞추고 있어요. 반면 외국에서 장소 특정형 공연을 제대로 하는 예술가를 보면, 어떤 지역의 기념비적이거나 특징적이고 역사성을 가진 것을 직접 소재로 해서 그것에만 어울리는 공연을 창작하곤 합니다.
장소 특정형 공연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외국 사례도 같이 얘기해도 좋고요. 포괄적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특정’ 장소의 ‘속성’에 대한 ‘연민’
박나훈 _ 사실 ‘장소특정적 공연의 모든 것’이라는 주제가 굉장히 광범위한데요. 왜냐하면 극장 역사보다 더 오래된 장소특정적 공연 즉, 원시기원설, 포스트 모던 유래 설, 대안 연극 유래 설, 미술 유래 설 등 다양한 기원설을 가진 장소특정적 공연의 모든 것을 오늘 논하기에는 제목이 너무 광범위하네요. 저는 2012년 ‘한-핀란드 커넥션’, 2015년 ‘한-덴마크 커넥션’, 그리고 작년에 ‘한-이태리 커넥션’까지 예경 사업을 주로 많이 했었는데요. 예경이 아무래도 국내사업보다는 좀 더 선제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훨씬 더 국제 공연시장 감각에 최적화 돼있는 기구잖아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북유럽의 장소특정적 공연의 협업을 통한 경험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12년 ‘핀란드 커넥션’에서 핀란드와 매칭해서 사리 팜그렌과 함께 세운상가에서 장소특정적 공연을 했어요. 그때 세운상가가 굉장히 유명했어요. 중간에 무산되기는 했지만, 오세훈 시장이 세운상가부터 남산까지 타워를 만드는 도시계획을 내세웠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 도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재생할지가 굉장히 이슈였어요. 그때 핀란드의 ‘댄스 인포’에서 먼저 김수근 건축가가 지은 건물에서 공연하겠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 건축물이 굉장히 수려하고 영화 배경도 많이 돼서 유명한 장소에요. 거기에 한 달 동안 상주하면서 대본 추출을 위해서 지역 주민들과 만났는데,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어요. 그에 비하면 2015년 ‘덴마크 커넥션’의 키트 존슨 같은 경우는 덴마크 출신인데, 4년을 걸친 교류 끝에 시댄스에서 프리젠팅을 해주었고 “창신동” 공연 작업을 해서 작년에 공연을 했어요. ‘한-이태리 커넥션’은 지금 하고 있는 중이고요.
장소특정적 공연은 사실 원래 북유럽이 굉장히 잘했어요. 상업화된 뉴욕의 펀치트렁크 보다는 개인적으로 더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뉴욕의 펀치트렁크극단의 “이머시브 연극” 이나 호주의 원스텝앳어타임라이크디스(One step at a time like this) 극단 등도 굉장히 잘 잘 하고 있어요. 그런데 북유럽이 때가 좀 덜 묻었죠. 북유럽 무용가들의 춤이 아주 소박하고 캐주얼하고 예쁘잖아요. 그런데 춤 만드는 과정을 보면 리서치 중심인 그런 공연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키트 존슨과 나눈 얘기도 하나에요. 영어로 하자면 ‘스피시픽(specific)’, ‘제네릭(generic)’, ‘심퍼테틱(sympathetic)’, 그러니까 ‘특정’ 장소의 ‘속성’에 대한 ‘연민’, 이 세 가지를 우리가 항상 이야기 하거든요. 그래서 키트 존슨이랑 같이 창신동 작업을 할 때는 먼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집을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문장을 하나 골라요. 제가 오늘 정호승 시인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책을 가지고 왔는데요. 이 안에 보면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 한 문장 안에 모든 게 다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장소에 대한 특정성, 이해, 연민이 모두 가미가 되어 있는 겁니다. 이 공연은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일반 극장 공연과 다르게 장소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연민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속성’이라는 말 안에는 도시 재생, 공동체, 사회성, 공공성, 정치성 등이 다 들어가 있는 거고요. 가령 ‘이 도로에서 춤을 춰도 되는 것인가?’, ‘이 도로에서 춤을 추면 그 저작권은 누구한테 있는 것인가?’ 이런 공공성에 대한 문제까지 건드리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장소특정적 공연은 특정한 것의 속성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시픽’, ‘제네릭’, ‘심퍼테틱’ 이 정도로 정의하는 게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극장 공연을 거리로 그대로 옮기는 것을 장소특정적 공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많이 범하고 있는데, 장소특정적 공연은 생각보다 범위가 굉장히 넓고 깊이가 있습니다. 또한 굉장한 리서치를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절대 작가 중심이 아니거든요. 지역 사람들과 같이 하는 거예요. 장소특정적 공연은 항상 먹는 행위를 같이 하곤 하죠. 특히 덴마크 예술가들이 그걸 잘하는데요. 이번 공연에 음식 할 거냐고 물어보는데, 음식을 먹는다는 건 그만큼 그 지역 주민들과 친해야 된다는 얘기죠. 아무튼 아까 말씀드린 그 세 가지 정도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댄스 축제가 저를 나름 한국의 대표적인 장소특정적 공연예술가라고 소개를 해주고 초청을 해주었습니다. 제가 극장공연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웃음), 그나마 장소특정적 공연에서는 박나훈을 높게 사주셔서 계속 프레젠팅을 해주셨고, 그걸 가지고 해외에 나가서 공연을 해야 되니까 중점적으로 밀고 나갔죠. 그렇게 진행해왔습니다만, 장소특정적 공연이 쉽지는 않습니다.

공연자와 관람객의 새로운 관계/참여 방식
김나이 _ 사실 장소특정적 공연에 대한 개념화 작업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우선 장소특정적인 공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시니엄 극장에서 이루어졌던 공연이 어떤 계기로 극장을 탈피 했는지 이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세 가지 사례로 현재 공존하는 장소특정적 공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흔히들 무용에서는 저드슨댄스시어터를 통해 장소특정적 공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현대무용의 선구자 중 루스 세인트 데니스(Ruth St. Denis)에서부터 장소특정적 공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인트 데니스의 같은 경우에는 이집트 여신 이시스(Isis), 힌두교의 여신 라다(Radha)등과 같은 인물들을 춤으로 표현하면서 사원(temple)에서 춤을 추었죠, 이와 같이 캐릭터 혹은 내러티브를 극대화하기 위해 장소특정적 공연이 있을 수 있는거죠.
두 번째로 저드슨댄스씨어터(Judson Dance Theater)는 머스 커닝햄과 존 케이지의 예술 사상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 당시 베트남 전쟁, 핵무기 등의 시대적 문제가 있었는데 젊은 세대는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예술을 통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했죠.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포스트 모던 댄스의 실험 중 하나는 장소특정적 공연이었고 이는 반 영웅주의 사상 바탕으로 모던 댄스(마사 그레이엄/도리스 험프리)에서 존재했던 관객과 공연자들의 수직적인 계급의 구조를 수평적인 관계로 그리고 동작 또한 화려한 테크닉에서 일상적(pedestrian) 움직임의 탐색이 이루어지면서 극장 밖으로 나오게 됐죠. 이와 같이 포스트 모던 댄스 시대에 발현 된 장소특정적 공연은 대체적으로 개념적 예술(conceptual art)로 이해해야 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 개념을 만들어낸 영국의 펀치 드렁크(punch drunk), 대표작으로는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있죠. 이 같은 경우는 세인트 데니스 처럼 드라마틱 요소를 극대화 시키면서 추가적으로 관객 관람 형태를 프롬나드(promenade) 형식을 채택/부각 시키면서 관객에게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게 하는 거죠. 이러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장소특정적 공연은 프로시니엄 시어터 밖의 모든 장소 야외 혹은 실내에서 진행되는 공연으로 그 공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살려내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극대화하며 공연자와 관람객의 새로운 관계/참여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댄스
심정민 _ 중요한 지점이 나왔는데요.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무대 위에서 하는 잘 만들어진 완제품 같은 것을 순수예술로 보고 그것을 위주로 평론을 하는 시대가 꽤 오래 지속됐었어요. 그런데 2010년대 들어서 점차적으로 고정관념이 깨지고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전에는 평론가들의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부분들, 예를 들면 장애 무용, 장소 특정형 공연, 커뮤니티 댄스 등이 유의미한 발전과 확산을 보이면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그 말은 곧 예술적으로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평론가가 써야 할 것과 쓰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콩쿠르나 학예발표회 같은 것에 대해서 평론을 쓰면 평론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쓸 수 없거든요. 옛날에는 장소 특정형 공연, 커뮤니티 댄스, 장애 무용이 그런 맥락에서 좀 기피하던 대상이었는데, 최근에는 그것들이 굉장히 유의미해 졌어요. 공연예술로서의 무용이 매우 세분화되고 확장되었고, 새로운 흐름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들을 딛고 많은 천재적이고 역량 있는 무용가들이 장소특정적 공연을 대안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극장 공연에서는 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것들과 예술적인 새로운 세계들을 장소 특정형 공연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오히려 관심을 더 많이 받고 있습니다.
시각예술이나 연극 쪽은 20세기 중반부터 벌써 그런 조짐이 나왔는데, 무용에서는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댄스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포스트모던 댄스의 기수이자 거의 유일하게 메인무대에서도 성공한 무용가인 트리샤 브라운의 70년대 작품들을 보면 지금 봐도 정말 기발하고 상상력 있는 것들이 많아요. 무용뿐 아니라 공연예술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준 실험작들이 많습니다. 정재혁 선생은 트리샤브라운무용단에서 주축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공연한 경력을 갖고 있는데 해외에 본 장소특정적 공연을 소개해 주시죠. 정재혁 선생 또한 갤러리라든가 여러 곳에서 공연한 경험을 갖고 있는데 본인의 이야기도 좋고요.
정재혁 _ 저는 개념 같은 것보다는 그냥 조금 편하게 얘기를 해볼게요. 외국 무용단에서 활동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무용단이 상주하는 뉴욕 뿐 아니라, 다른 국가 극장 공연을 하게 되더라도 야외공연이나 특정 장소 공연이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런 공연을 7~8년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공연의 흐름을 잘 따라올 수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걸 바탕으로 제일 처음에 하게 된 작업은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윌리엄 포사이드, 파블로 브론스타인, 마이클 켈리 등 외국 아티스트들과 함께한 「무브(MOVE):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과 무용」이라는 전시였습니다.
사실 그 작업이전에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저는 무용단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한국에서 작품을 사가겠다고 해외로 오는 분들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은 트리샤 브라운 무용단이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라인 업(Line up)」이라는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작품을 보고 한국에 왔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유가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여기서 이런 공연을 하니 한국에서도 이걸 하면 어떨까 하는 거였어요. 그래도 우선 공연을 하는 것에 대해 협의를 했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작품에 대한 이해도 없이 진행하려고 하는 모습이 많이 속상했어요.
사실 그 작품의 경우 처음 만들 때 안무가가 부여한 규칙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머리 위에 올려둔 막대가 2번 떨어지면 작품을 끝낸다.’ 이런 식의 규칙들이요. 뉴욕에서 서울까지 10시간 넘게 날아와서 공연을 할 때, 5분 안에 막대가 2번 떨어지면 바로 끝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을 이야기 했더니 “그러면 성공할 때까지 하면 안 될까요?”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면 그 작품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다른 작품과 함께 공연을 할 수 있게 한다던가, 어울릴만한 작품을 추천 받는 것처럼 더 나은 방향을 제시했었다면 공연이 되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그 작품은 한국에 오지 못했어요.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트리샤 브라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숲의 마루」라는 작품을 맡아서 하게 되었어요.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제가 그 작품을 맡아서 재현하게 됐죠. 그런데 관객 반응도 별로고 2010년도에는 그걸 미술관에서 한다는 것도 별로 관심을 못 받았어요.
심정민 _ 그걸 2010년에 우리나라에서 했다고요? 왜 제가 몰랐지요? 여기서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나오는데요. 장소특정적 공연이 의외로 홍보가 잘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어서 알았으면 무조건 보러 갔을 텐데, 우리나라에서 하는지 몰랐어요.
박나훈 _ 장소특정적 공연은 기본적으로 몇 백 명씩 되는 다수의 관객을 데리고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죠. 20~30명 정도로 정해져 있습니다. 심지어 호주의 「원 스텝 앳 어 타임 라이크 디스」 같은 경우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다 보니, 많은 관객이 모이기 어렵죠. 그런 경우도 있어요.
정재혁 _ 그런데 아닌 경우도 있어요. 제가 좋았던 경험 중에 하나가, 파리에서 공연을 하면 몇 천 명이 따라다니거든요. 공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음에도 그냥 놀러왔던 사람들이 공연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다니면서 보고 있더라고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스위스에서는 공장에서도 해봤고 극장이 아닌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에서 공연을 워낙 많이 하다보니 한국에서 하면 어떨까 상상했고 한국 사람들에게도 그런 작품들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중요한 것은 장소에 대한 명확한 이해
심정민 _ 장소특정적 공연을 하면 전통적인 무대에서와는 다른 의도나 방법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이를테면 극장 공연에서는 파인 아트적인 동작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면 장소특정적 공연에서는 그 장소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활용할지가 중요하겠죠. 리서치 자체가 다를 겁니다.
정재혁 _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장소에 대한 명확한 이해예요. 전체적인 그림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장소를 여러 각도로 보면서 어디서 할지를 결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는 것 같아요.
심정민 _ 연습 자체보다 공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군요.
정재혁 _ 연습은 항상 하니까 준비가 되어 있는 거고, 장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일지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리고 당황하거나 부딪히지 않게 동선을 고려해서 작품을 만듭니다.
제 경험상 한국에서는 관객들의 성향도 고려해야 해요. 공연을 한다고 하면 서로 더 앞에서 보려고 하는데 외국에서는 안 그래요. 보이면 보고, 안 보이면 말고 하면서 더 편안하게 즐겨요. 지난번에 보셨다고 했던 공연의 장소가 타일 만드는 회사에서 만든 갤러리예요. 조그만 가게에서 시작해서 크게 성장한 회사인데 그 회사 대표가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전시회를 부탁했고 그 작가님이 저에게 같이 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서 하게 됐어요. 저는 관련 경험도 있으니까 공연을 준비했는데, 사람들이 당황을 하더라고요. 2개 층의 갤러리라 3층에서 공연을 하다가 4층으로 옮겨가면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 생각했는데 안 따라오더라고요. 그래서 관객들이 따라올 수 있게 안내를 해야 했어요. 그리고 저는 좀 편안하게 즐겁게 하려고 음식을 준비했는데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그 공간 중에 두 평도 안 되는 작은 베란다가 있어 활용해서 춤을 췄는데, 그 안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던 분들이 무용수가 들어가니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얼음이 된 채 20분 동안 가만히 있더라고요.(웃음) 그냥 편하게 나오면 되는데 그런 경험들이 없었던거죠. 그래서 가서 나오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재밌는 일들이 참 많았네요.
심정민 _ 십여 년 전에 뉴욕의 폐 초등학교를 개조한 미술관을 간 적이 있었는데 무척 재밌더라고요. 지하에서 3층까지를 돌아다니면서 하는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당시로서는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새로운 공연 형태에 대한 관객의 적응도 필요할 겁니다.
김나이 선생은 영국과 홍콩 등 외국에서 오래 계셨습니다. 포스트모던 댄스는 미국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서유럽 컨템퍼러리 댄스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잖습니까. 2000년대와 2010년대 들어 영국의 컨템퍼러리 댄스에 대해 제가 주목하는 이유가 영국 쪽 컨템퍼러리 댄스가 다양한 창작적 활동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장소특정적 공연에 대해서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지에서 관련 유명 작가나 인상 깊게 보신 공연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는 관객들의 성향도 고려해야
김나이 _ 영국은 사실 문화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나라에요. 고전성과 역사적인 맥락을 중시하는 거죠. 그래서 영국은 공간에 대한 역사성을 되새김하고 보존하는 역할로서 장소특정적 공연의 아티스트들을 많이 활용하는 것 같아요.
유럽은 전통 때문에 망하고, 미국은 전통이 없어서 망한다는 얘기가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저드슨댄스시어터 같은 경유 깊은 전통/문화/고정관념이 미비했기에 그만큼 자유롭고 실험정신이 컸던 것 같아요. 유럽, 영국 같은 경우는 그 전통을 보존하려고 하는 거고요.
영국에서는 무용 쪽으로 젊은 아티스트들이 안무와 공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추구 하면서 특정 장소 공연 만들고 있어요. 매 공연마다 공간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공간 안에서, 신체와 공간, 공간과 관객, 공연자와 관객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한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어요.
심정민 _ 그러한 단체들을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 축제에서 소개하여 장소특정적 공연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어느 수준까지 올라와 있는지를 소개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 무용가들에게 장소특정적 공연이란 무엇인지에 정확한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요.
김나이 _ 소개를 하면, 영국의 경우 ‘펀치 드렁크’와 ‘뉴 무브먼트 콜렉티브’가 있어요. ‘펀치 드렁크’는 대표작으로 10년째 뉴욕에서 정기 공연으로 자리매김한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가 있죠. 최근 몇 년 상해에서도 이어져 오다가 지금 코로나로 인해 철수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뉴 무브먼트 콜렉티브’는 젊은 세대들이 만든 단체에요. ‘댄스/건축/콜라보’를 중심으로 작업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특정 장소를 어떻게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을 해요.
미국은 뉴욕에 있는 ‘서드 레일 프로젝트(Third Rail Projects)로 이머시브 시어터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덴 쉬 펠(Then She Fell)」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릭터들을 현대화하여 뉴욕의 폐허가 된 정신병원에서 7년 반 동안 정기 공연으로 이어 오다가 코로나로 인해 닫았습니다. 아무래도 장소특정적 공연은 공간의 특성 때문에 순회 공연이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국 안무가 스테판 코폴로비츠(Stephan Kopolowitz)가 정의하는 장소특정적 공연 개념중에 사이트-어댑티브(site-adaptive 공연; 고유하지 않은 공감) 같은 경우에만 순회 공연이 가능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미국, 반달루프(BANDALOOP) 단체를 소개하고 싶은데 등반 기술을 접목하여 높은 건물 벽면 혹은 아찔한 낭떠러지에서 공연을 만들어가는 단체들이 있어요. 이렇게 보니 정말 다양하게 장소특정적 공연을 만들어가는 단체들이 있는 것 같네요.
심정민 _ 북유럽에서 잘 알려진 장소 특정형 공연이나 단체가 있을까요?
박나훈 _ 아까 말씀드린 키트 존슨이 노르딕 쪽에서는 워낙 알아주는 예술가에요. 극장뿐 아니라 여러 곳을 넘나들고, 투어도 많이 다녀요.
심정민 _ 어떤 스타일인가요?
박나훈 _ 키트 존슨은 일단 맵핑이라는 걸 해요. 조나단 버로우가 했던 스코어 작업과 비슷한 건데요. 지도를 가져와서 넌 저기, 난 여기 이런 식으로 맵핑을 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서 뭘 할지를 생각하죠. 그걸 가지고 스코어 작업을 해서 섞거나 예측 불가능한 걸 만들어 내요. 이 모든 것들은 기본적으로 지역 주민의 협조와 사랑 없이는 가능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서로 친해지는 작업을 길게 하는 거예요. 온전히 그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에요. 마을 어귀에 있는 벤치에 원주민과 외부인이 같이 앉아 있으면서 거기서 생성되는 묘한 것들이 있죠. ‘이 의자의 주인은 누구인가?’, ‘예술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런 공공성의 문제까지도 건드리는 거거든요. 그런 걸 좋아하는 거죠.
물론 구체적으로 춤은 각 씬 별로 어떻게 형상화할지 생각하면서 움직임을 발전시키는 거고요. 그걸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멘토링을 두 명이 하고 창작자는 대략 7명 데리고 와서 해요. 한 마을을 통째로 하면 10개 정도의 피스가 나와요. 키트 존슨은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합니다. 저와도 그렇게 같이 했고요. ‘한-핀란드 커넥션’에서 했던 「사리 팜그렌」은 이머시브로 해서 펀치 드렁크처럼 건물을 통째로 갖고 했습니다.
심정민 _ 환경 관련해서 덧붙이자면 미국의 원 리버 프로젝트라고 해서 미시시피 강가에 위치한 여러 지역 이를테면 멤피스나 뉴올리언스 등의 지역 커뮤니티와 연계해서 작업을 펼친 장소특정적 커뮤니티댄스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미시시피강 지역의 문화적 재생 운동까지도 포괄하는 프로젝트죠. 이러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을 듯합니다.
박나훈 _ 네. 그런데 유럽은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아요.
심정민 _ 그러니까 크게도 할 수도 있고, 작게도 할 수 있네요.
박나훈 _ 그렇죠.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성은 비슷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장소특정적 공연은 어떤 식으로든 극장 공연과 상호 호혜적이라고 생각해요. 극장 공연도 리서치를 하잖아요. 저는 이 세상에 어떤 공연도 장소특정적이지 않은 공연이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식으로든 무대 위에서 뭔가를 재현해내는 거잖아요. 그걸 위해서 돈을 들여서 무대를 디자인 하는 거 아닙니까? 장소특정적 공연의 장점은 그 자체로 이미 무대가 완벽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만들 수 있는 모든 무대미술의 아우라를 뛰어넘는 거예요. 그래서 훨씬 매력적이고 지형이 넓고, 여지가 많아요.
심정민 _ 무궁무진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거죠.
박나훈 _ 오히려 거기서 가져오는 겁니다. 아까 김나이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설치미술 하는 팀들 입장에서는 그런 면에서 워낙 자유로워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고 제약되는 조건도 동시성을 추구하는 공연예술과는 다르죠, 아시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최정화 씨와 작업을 오래 했기 때문에, 설치 미술이 가지고 있는 비주얼의 탁월함과 시각적 충격은 상상할 수도 없죠. 춤과 만났을 땐 서로 안 지려고 싸우지만, 심지어 그 설치미술이 움직이기까지 하면 효과가 더 커요. 아무튼 결론을 내리긴 성급할 수 있겠지만, 저는 장소특정적 공연과 극장 공연은 서로 상호 호혜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소특정적 공연에서 리서치 공부를 많이 하면 그게 극장 공연에서도 쓰일 수 있고요. 저는 극장 공연이 갈수록 재미가 없어요. 극장이라는 공간에 집어넣어야 되니까 그게 싫은 거죠. 그래서 오히려 장소특정적 공연이나 마을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해프닝이 더 감동적일 때가 많더라고요.

장소특정적 공연은 어떤 식으로든 극장 공연과 상호 호혜적
심정민 _ 지금 컨템퍼러리 댄스 시대인데, 컨템퍼러리 댄스의 특징이 바로 그겁니다. 기존의 춤을 따라가기보다는 새로운 창조력을 발산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혁신적인 실험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따라서 적지 않은 창작자들이 기존의 예술적 한계나 경계를 뚫기 위해서 장소특정적 공연을 시도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댄수의 기수인 트리샤 브라운이나 컨템퍼러리 발레를 이끈 윌리엄 포사이드 같은 창작자들을 보면 무대 위에서 파인 아트적인 작품도 잘 만들지만 기존의 영역을 대폭 확장한 장소 특정형 공연도 그만큼 잘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주류 무대에서 활약하는 무용가들 중에서 장소특정적 공연을 제대로 잘 한다고 인정받는 예술가로는 누가 있을까요?
정재혁 _ 저는 벨기에의 로사스 무용단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작품들은 극장에서도 미술관에서도 필름작업에서도 자신의 색을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요소들을 담고 있어요.
심정민 _ 컨템퍼러리 댄스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무용과 다른 예술 분야와의 융복합인데요. 사실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융복합은 거의 다 나왔다고 봅니다. 연극, 영상, 동양무술, 설치미술, 건축, 서커스 등 수많은 분야와 융복합을 시도해왔기에 끌어들일 만한 새로운 분야를 찾기도 힘듭니다. 장소특정적 공연은 무대라는 갇힌 공간을 벗어나기 때문에 표현 방법이 다양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가면 설치미술 같은 작품을 시도해 볼 수도 있고 야외로 나가면 주위 환경이나 풍광으로 인해 새로운 느낌을 줄 수도 있고요, 이런 것들이 극장 무대에서는 활용할 수 없는 요소들이잖아요. 이런 식으로 예술표현이 무궁무진하게 확장될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재혁 _ 사실 장소 특정형 공연은 예술가가 어떤 장소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작품을 만들어내야 시너지가 난다고 생각해요. 그 장소에서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거죠. 하지만 요즘 극장 대관이 안되니까 대체할 장소를 찾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장소 대관 경쟁에서 떨어지고 공연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장소를 찾다 보니 그게 장소 특정형 공연이 되고 융복합이 되고 다원예술이 되는 거죠. 그런식으로는 발전하지 않았으면 해요.
심정민 _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넘어갔는데요. 지금 국내에서 젊은 사람들이 장소특정적 공연을 한다고 말들은 합니다. 하지만 가서 보면 ‘저게 왜 장소특정적 공연이지?’ 싶은 경우도 있어요. 무대에서 해야 될 공연인데 대관을 못 받았거나, 대관료가 비싸거나, 아니면 단순히 특이한 걸 해보자는 이유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소특정적 공연은 그 장소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바로 그 공간에 맞는 작품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어디에서 내놔도 똑같은 작품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내 무대에서 올려도 되는 그런 평범한 작품을 다른 장소에서 했다는 것만으로는, 장소특정적 공연이라고 말하기 조금 힘든 점이 있습니다.
박나훈 _ 그게 바로 아까 말씀드린 장소의 속성에 대한 ‘연민’이 없는 거죠. 장소에 대한 연민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죠.(웃음)
정재혁 _ 아까 그 지역 사람들과 오랜 시간 같이 생활하고 이야기하면서 작품을 준비한다고 하셨는데, 그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특정 공간을 잘 안다든가, 작가와 관객이 서로 너무 잘 알아서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알고, 평소에도 친구처럼 계속 대화를 하면서 안무가가 내는 색깔이 그 곳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공연할 장소가 없거나 그 장소가 단순히 마음에 든다고 거기서 공연을 해야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기존의 예술적 한계나 경계를 뚫기 위해서 장소특정적 공연을 시도
심정민 _ 장소특정적 공연은 더 폭넓고 깊이있는 리서치 작업을 필요로 하고, 구성원들 간에 그리고 타 분야와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경험이 축적되어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고려 없이 마냥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장소특정적 공연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되는데, 얼마 전 김나이 선생의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도 흥미로웠습니다. 그 작업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어떤 과정과 방법을 거쳐서 장소특정적 공연을 해야 하는지 젊은 무용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나이 _ 저는 일단 어떤 작품이든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실황중계 공연을 많이 하고 있고 저 또한 무용 공연을 화면을 통해 접하고 있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무용의 가치는 현장성과 소통인데 화면을 통해서는 그 전달이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공연 같은 경우는 현 상황 때문에 장소특정적 드라이브인 공연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장소특정적 공연이나 극장 공연이나 작업하는 과정에 있어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극장 또한 표현주제에 따라 장소가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에요. 하지만 장소특정적 공연에서 중점적으로 생각해야는 것은 공간과 신체, 공간과 관객의 관계인 것 같아요. 첫째로, 공간과 신체에 있어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신체의 활용도는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정교한 움직임보다 전체적인 구조/구성을 통한 작품의 흐름/감정에 집중했어요.
그리고 둘째로는, 공간(작품)과 관객에 있어 차안에서 관람하는 관객의 시각을 탐구했습니다. 차 안에서는 극장과 다르게 모든 사람들이 같은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입장을 다 고려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관객의 부족한 시야는 녹화한 공연을 공연과 동시 상영(스트리밍)을 하여 해결했고 이것은 작품에 또 한 측면을 더 할 수 있었죠.
그 공간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활용을 하려고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 갔죠. 작품과 관객의 만남 그리고 그 안에서의 관계를 항시 생각했어요.
박나훈 _ 저는 예경에서 프로모터 사업을 많이 했어요. 기획자로 해외 축제 나가는 거죠. 해외의 전형적인 플랫폼 페스티벌 말고, 스페인의 피라타레가 축제, 이탈리아의 바사노 델그라파의 오페라에스따떼(Operaestate) 축제 같이 여지가 있는 축제들이요. 그런 축제들의 주요 특징은 마을과 함께 하는 거예요. 마을 리서치는 굉장히 오래 하는데, 막상 공연을 올릴 때는 관객이 보다가 언제든지 나가고 들어가는 걸 용인하고, 어제 공연했던 사람이 관객이 되어 옆에서 같이 보기도 하면서 굉장히 캐주얼하게 해요. 권력이 예술가한테 있지 않은 거예요. 그런 편안함이 저는 굉장히 좋았어요.
심정민 _ 그러니까 춤의 원류로 돌아가는 거네요. 춤이 맨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계급화, 전문화되지 않은 상태로 행위자와 관람자가 서로 언제든 소통하고 전환 될 수 있는 그런 형태였습니다.
박나훈 _ 장소특정적 공연이 원시 기원설이냐, 포스트모던 기원설이냐, 대안연극 기원설이냐, 이런 많은 기원설이 있는데요. 누가 관광객이고 누가 아티스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런 축제에 가는 게 굉장히 좋아요.
물론 예술권력자들의 세계는 또 따로 있는 건 사실입니다. 예술계도 엄청난 권력 구조 하에 있죠. 그렇지만 저는 그런 축제를 지향해요. 또 작지만 저만의 컨텐츠를 하고 싶고요. 2012년에 ‘한-핀란트 커넥션’도 그랬고, 작년에도 그랬지만 리서치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또 결과물이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아요. 그래서 관객들도 공연을 보러 와서 반드시 뭔가를 얻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는 문화가 형성되면 좋겠습니다. 공연이 10분짜리든, 1시간짜리든 무엇을 얻어갈지는 결국 관객의 몫이잖아요.
심정민 _ 장소특정적 공연은 연속성, 지속성이 굉장히 중요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박나훈 _ 그렇죠. “이 세상에 장소특정적 이지 않은 공연은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식으로든지 극장예술은 무언가를 재현해내는데 주력하는거죠, 그에 비하면 장소특정적 공연은 춤을 만들고 감상하는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극장 공연이 가지고 있는 맹점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결과물을 만들어야 되고, 그 사이에 부수적으로 비평의 대상이 되고 혹 누군가는 그것을 이용하고 “권력구조”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나 아무렇게나 추고 아무나 아무렇게나 사라지는 즉 좀 편한 예술, 그런 동시성의 예술은 지속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장소특정적 공연의 경우.

언택트 시대 대안적 공연의 형태
심정민 _ 최근에 보니까 장소특정적 공연과 커뮤니티 댄스가 연결된 지점도 있는 것 같아요.
박나훈 _ 기본적으로 장소특정적 공연이나 커뮤니티가 한국에서 유행했던 이유는 대중성이라는 패러다임 때문이거든요. ‘더 이상 너희 예술가들이 유한계급에만 봉사는 춤 및 공연예술을 용인하지 않겠다. 즉 사회에 봉사하라는 거죠. 그 때부터 잘 팔리기 시작한 게 거리 공연, 커뮤니티 댄스, 장소특정적 공연입니다. 저는 어쨌든 지금껏 해 온 것처럼 고통스러운 리서치를 계속 할 거고요. 결과에 대해서 관객이 무언가를 가져가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리서치를 진솔하게 할 것이고, 관객은 그걸 다 가져갈 필요는 없는 거죠. 이런 식의 여지가 있고 강요하지 않는 공연 문화가 확산되면 거기서부터 예술의 독자성을 인정해주는 문화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아직 예술가에 대한 지위나 대우는 부족하지만요, 쉽지 않은 일이긴 할 겁니다.
심정민 _ 정재혁 선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업 과정이나 방법을 거치시는지요.
정재혁 _ 저는 장소 특정형 공연이나 극장 공연 모두 시각적인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연을 할 때 관객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가능한 다 확인을 해요.
전부를 다 아우를 순 없지만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어떤지, 윗쪽에서 보면 어떤지, 앉아서 보면 어떤지 이런 모든 각도를 계산을 해서 무용수들이 어떻게 서야 가장 좋을지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리허설이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아요. 아주 오래 리허설을 하면서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거죠.
그리고 아까 극장예술의 권력, 계급 이런 얘기를 하셨는데 저희 부모님조차도 극장에 공연 보러 가시면 복장을 너무 신경 쓰세요. 편안하게 와서 보셔도 되는데 정장 입어야 되냐고 물어보고 그러세요. 그런 문화를 없애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실 극장은 관객 동원이 너무 힘들어요.(웃음)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이 같은 돈으로 더 자연스럽게 전시도 보고 춤도 보고 음식도 좀 먹으면서 공연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관객들이 더 자연스럽게 극장 안으로도 들어오지 않을까 해서 시작을 해봤는데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심정민 _ 외국에서는 장소특정적 공연이 활발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고 따라서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분들은 선구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장소특정적 공연은 하나의 주요한 흐름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이러한 추세는 이어질 거라고 봅니다.
특히 지금은 언택트 시대잖아요. 기존의 공연 형태가 전염병에 취약하다보니 별의별 대안적 자구책들을 내고 있습니다. 장소특정적 공연은 이에 대한 대안적 공연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장소특정적 공연이 단순히 극장을 벗어난다는 의미 이상으로 좀 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고, 극장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는 대안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길을 열어주는 무용가들이 앞으로를 이끌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재혁 _ 장소 특정형 공연이 상황에 따라 많이 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데요. 정해진 안무를 정해진 대로만 하려고 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순간적으로 아이디어를 발휘해서 그 공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야 돼요. 무용수들 또한 상황 대처능력이 뛰어나면 조금 더 작품을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 작업 중에 건물 옥상에서 공연을 준비하며 관객들이 옆에 있는 다른 빌딩에서도 누군가 춤 추고 있는 걸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용수 한 명을 옆에 있는 빌딩 옥상에 올려놓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안 쳐다보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경험치에 따라 나와 관객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는 걸 그 때 깨달았어요. 저는 재미있고 특별한 걸 찾아서 다른 시도를 해본 건데, 안 보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관객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다양성을 볼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먼저겠구나 생각해요. 층을 옮겨다니는 작품에서 조용히 안내를 해주었던 것처럼요.
박나훈 _ 이건 좀 극단적인 제안인데요. 해마다 나오는 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기관 지원금을 한 해 정도라도 100% 전부 장소특정적 공연에 주는 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심정민 _ 너무 파격적이라 실현 가능성이 높지는 않을 겁니다.(웃음)

작고 소박하지만 강요하지 않는 컨텐츠들
박나훈 _ 왜냐하면 대형 공연장에서 몇 백 명 모아놓고 감동 주고 박수 기다리는 시대는 이제 지났거든요. 그만큼 모을 수도 없고요. 그렇다면 중요한 건 컨텐츠인데요. 아주 작고, 박수를 강요하지 않는 컨텐츠들이 만약 1년 안에 한국 땅에서 많이 나온다면, 결국은 그 자원들이 다시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고 봐요. 작고 소박하지만 강요하지 않는 콘텐츠들, 가령 여기 「춤지」 건물 앞에서 잠깐 하는 3분짜리 작은 공연들이 많이 쌓이면 어떨까 싶어요. 이게 환상일 수도 있지만, 1년 정도만 기관에서 춤 공연 지원금은 전부 장소특정적 공연에 준다면 이런 코로나 시대에 활로를 개척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심정민 _ 오늘 좌담에서는 장소특정적 공연에 대한 폭넓고 깊이있는 이야기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무용가들, 특히 젊은 무용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나라 컨템퍼러리 댄스도 이제 고착화가 되고 있는데, 그걸 극복하는 방안으로 장소특정적 공연을 잘 활용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공통적으로 나온 키워드로는 공간성, 공간의 속성, 소통, 연민, 현장성, 사회성, 공공성 등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탐구만으로도 장소특정적 공연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 하나하나가 방대하고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어느 정도 탐구를 바탕으로 장소특정적 공연을 시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씩만 해주시겠어요?
김나이 _ 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술에 있어 ‘소통’이 필수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장소특정적 공연은 극장에서와는 다른 ‘소통’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이해를 하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극장을 개방 된 공간으로 관객과 소통을 하는데 있어 소리를 높여 이야기를 전달할 것을, 장소특정적 공연은 친말한 공간으로 ‘소곤소곤’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죠. 다시 말하면, 작품이 관객과 무엇을 어떻게 소통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 공간을 고려하고 흡수해서 안무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화려한 움직임을 넘어서 본질적으로 안무가 무엇이고, 본인이 하는 예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박나훈 _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장소특정적 공연이 극장 공연과 상호호혜적인 관계가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장소특정적 공연을 제대로 하려면 기본적으로 리서치를 근간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 하에, 리서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북유럽의 몇 개의 춤들은 제가 볼 때 소박하지만 굉장히 감동적이거든요. 공연이 자신의 리서치의 산물이니까요. 그리고 관객이 무엇을 가져갈지는 작가의 몫이 아니에요. 롤랑 바르트가 얘기했듯이 저자의 죽음이 선포 된지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장소특정적 공연의 리서치라는 고통스러운 훈련이 오히려 좋은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돼요. 그런 의미에서 춤 안무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열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정재혁 _ 저는 오히려 보여주는 게 다라고 생각해요. 안무의 의미는 그 다음이고요.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보이는 게 먼저 호감이나 관심을 얻어야 그 안무의 의미에 대한 관심도 가질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특정 장소에서 공연을 할 때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 화려하든, 소박하든 우선 관객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포커스도 항상 그 쪽에 맞춰져 있어요.
심정민 _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가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른 하나의 표현 방법으로서 장소특정적 공연은 컨템퍼러리 댄스 시대에 그리고 언택트 시대에 매우 중요한 흐름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오늘 기대 이상으로 폭넓고 깊이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사실 이러한 예술적 논의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무용가들이 너무 지원기관과 정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예술적 논의가 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8월 중순에 또 다시 코로나19 국면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어려운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