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7일 인쇄
2021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21년 1월호 통권 539호 |2025년 4월 16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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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동 趙興東
출생 : 1941년 경기 이천
학력 : 중앙대 및 동 대학원 졸업
경력 : 동명여고 교사(1966), 한국무용평론가협회 회원(1982),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1992), 한국남성무용단 창단(1982), 국립무용단 단원(1982), 국립무용단 상임안무가(1990), 국립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1993), 태평무보존회 회장(1995). 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1991-), 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2001-), 국민대 무용학부 초빙교수(200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2003-)
수상 :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 입상(1979), 제3회 「대한민국무용제」 안무상(1981), 서울특별시 문화상(1992), 한국예술가평론가협의회 선정 최우수 예술가상(1993),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1995, 문화체육부), 제27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5), 문화관광부 주최 「문화훈장 목련장」(2000)


작품활동
출연작
『원효대사』(1977) 『황진이』(1981) 『썰물』(1982) 『은하수』(1986) 『한량무』(1999) 『우리 아버지』(1999) 『회상』(1999) 외 다수
안무작
『귀향』(1968) 『선화무』(1968) 『고풍의 연가』(1968) 『광영』(1969) 『벌의 상태』(1969) 『회한』(1969) 『춘향전』(1971) 『제신의 고향』(1974) 『이차돈』(1976) 『탑교놀이』(1978) 『푸른 흙의 연가』(1979) 『춤과 혼』(1982) 『회상』(1982) 『맥』(1983) 『부마사랑』(1983) 『부운』(1984) 『젊은 날의 초상』(1985) 『대』(1986) 『길놀이』(1988) 『신』(1989) 『흙의 울음』(1990) 『강강술래』(1992) 『환』(1993) 『무천의 아침』(1994) 『우리 춤 그 맥』(1997) 회상(1997) 『김삼갓』(1997) 『비나리 98』(1998) 『우리춤 그 맥 2000』(2000) 『연인』(2000) 『나흘간의 춤 이야기』(2000) 『황진이』(2001)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2001) 『조흥동 춤의 세계』(2002) 『합의 빛』(2002) 『마의태자』(2002) 외 다수
저술활동
한국에서 조흥동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춤꾼이다. 위로는 전통과 신무용, 아래로는 창작춤으로 둘려 쌓여 있는 조흥동의 위치는 이것도 아니거나, 또는 이 세 지점을 모두 관통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더 정확하게는 신무용 2세대들과 대학무용가들의 세대를 잇는 중간지점에 그가 서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경기도 이천의 대지주집 외동아들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춤에 원초적 이끌림에 의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춤꾼으로의 인생에 발을 딛어 놓는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끼와 당대 최고의 춤꾼들을 모두 경유한 그를 일컬어 한쪽에서는 사전식 춤추기였다라고 정리하기도 한다. 1968년 첫 개인무용발표회 이후 수많은 공연을 통해 그는 사전식 춤추기의 본보기를 선사해왔다. 그는 전통춤만으로 무대를 꾸미기도 하고 어느 때는 신무용류로서, 또 어느 때는 무용극 양식이나 이와는 완전히 색다른 창작춤의 모습을 견지하기도 한다.
전통춤의 형식에 자신의 창작력을 가미해 만든 『회상』(1982)은 그의 이러한 춤추기의 내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형식면에서 김백봉의 『부채춤』이나 『장고춤』, 『산조』, 김진걸의 『산조』와 같은 신무용 레퍼토리와 한 흐름 속에 묶어도 무방할 정도로 격과 작품의 완성미를 추구하고 있다.
창작춤은 표현성이 강조되면서 진지함과 긴장감이 따르는데 비해서, 신무용은 비록 짧은 공연의 길이를 갖지만 조탁된 균형성을 존중한다. 그러면서도 그 춤은 지나치게 자아에 침잠하기보다는 움직임의 서정적인 표출을 더 존중한다. 『한량무』의 분위기를 가지면서 더 억제된 움직임을 쓰면서 무대공간이 후면에서 추어지는 짧고 효과적인 신명남의 춤, 그리고 춤의 구도에 있어 공간의 비대칭적 균형성을 적절히 활용한 이 춤은 우리의 신무용사의 한 레퍼토리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전통춤에서 발견되는 조흥동의 춤은 호남의 기방적 교태미나 고도의 세련된 정제미도 아니고 영남의 텁텁하고 질퍽한 멋과도 차이가 난다. 그의 춤은 동작이 화려하거나 맺고 끝는 맛이 선명한 것도 아니다. 조흥동의 춤은 일단은 유려한 기품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순응적이며 여백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타고난 조흥동의 심성과도 관계되고 또는 출생 및 성장과정 그리고 춤학습 내력과도 맞물리면서 한편으로는 궁중문화가 뿌리깊게 잔존하고 있는 중부권 문화특징의 한 반영으로도 볼 수 있다.
조흥동이 안무한 창작품으로는 2분에 소요되는 소품에서부터 1시간 20여 분이 넘는 대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형식면에서도 전통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줄거리에 주안점을 두고 전개되는 무용극 형식, 또는 추상성을 가미한 형식 등 그가 사사한 스승의 계보만큼이나 다양한 색채를 지닌다.
그의 작품에는 우리의 전통춤과 민속연희, 무예 등에서 포착되는 요소들이 두루 가미돼 있다. 1979년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 출품작 『푸른 흙의 연가』에서 온달장군을 묘사하면서 봉술과 무술 등의 몸짓을 처음 사용한 이래 1985년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안무작 『젊은날의 초상』에서는 더욱 구체화된다.
조흥동의 또 다른 대표작 『무천의 아침』 또한 이 같은 시각에서 읽혀지는 작품이다. ‘춤으로 드리는 제사’라는 부제가 붙어있듯이 우리의 옛 제천의식인 영고·동맹·무천의 제의(祭儀)과정을 춤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땅과 사람과 하늘을 춤으로 형상화하면서 사람이 땅의 주인으로서 신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 관심을 모았다.
조흥동은 한국 남성춤꾼의 대표주자로서 전통춤과 신무용 창작춤 등 근·현대 한국춤을 감싸고 있는 세 장르를 공히 섭렵한 춤꾼이자 안무가이다. 일찍이 당대 최고의 명무(名舞)들을 사사하면서 춤사위에 연륜과 깊이를 더했다. 중견에 이르러서는 한국남성무용단을 창단, 남자춤의 진면목을 과시했으며 국립무용단의 지도위원을 거쳐 단장 겸 예술감독을 역임하면서 신무용 계열 국립무용단의 예술경향에 한국 창작춤의 혁신적 요소를 가미, 새로운 전통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 행정가적 역량으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직을 10여 년간 수행하면서 한국 무용계를 리드해 왔다고 이상 평론가 성기숙은 설명한다.
한편 2002년 공연된 ‘춤 입문 50년’이란 부제가 붙은 「조흥동 춤의 세계』는 무엇보다 남성 무용수들에 의한 새로운 맛깔의 춤을 대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의 춤세계는 대편성의 생음악 연주를 곁들여 오랜만에 우리 장단과 춤의 앙상블을 제대로 맛볼 수 있었던 무대였다. 개개 춤의 내용에 따라 빛을 각기 달리해 무대를 빛낸 조명의 기여를 높이 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예술행정가로서보다 무용수로서 그의 진가를 확인시켜주었다는데서 그에게나 우리 춤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장광열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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