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演評

□ 유니버설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한·일 월드컵」으로 인해 공연계가 예상치 못한 고전을 겪었다. 우리 축구팀의 선전으로 우리 팀의 경기가 있는 날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가 돼, 각본 없는 장대한 스펙터클이 시청앞과 광화문, 대학로의 거리에서 펼쳐져 공연장이 텅텅 비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비교적 상연일이 긴 연극의 경우 우리 팀의 경기가 있는 날 공연을 취소하면 됐지만, 공연 일이 하루나 이틀, 길어야 일 주일에 불과한 음악이나 춤의 경우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한 채 눈물을 머금고 막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팀의 16강 진출 여부가 걸린 한국과 포르투갈의 경기가 열리던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세계 초연한 유니버설발레단(단장 문훈숙)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이 안타깝게도 여기에 포함되고 말았다. 보통 단체 같았으면 이 같은 날 공연은 관객들이 없어 그냥 무산됐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학로에서는 관객은 고사하고 배우가 도착하지 못해 공연의 막이 오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유니버설발레단은 다행히 1층 관객은 거의 채운 채 공연을 시작했다(물론 축구경기 결과가 궁금해 막이 내리자 마자 피날레 박수도 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난 관객들도 많았다).
이 작품은 키로프의 거장 올레그 비노그라도프가 유니버설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98년도부터 구상해온 역작. 비노그라도프와 함께 작업을 해온 무대디자이너 시몬 파스투크와 의상디자이너 갈리나 솔로비예바는 3년 전부터 이 작품의 무대와 의상 작업을 해왔다.
세계적 거장이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작품이니 만큼 무대와 의상에서부터 범상치 않았다. 베로나의 광장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무대는 관객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또 창문의 배경을 바꿈으로써 침실로, 성당으로 재치있게 화려하게 변화하는 무대는 우리 발레무대 사상 가장 화려한 무대라고 하기에 지나침이 없어 보였다.
또 영화보다 더 실감나는 가면무도회 등 화려한 의상도 일품이었다. 르네상스시대의 화려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의상들은 우아하면서도 웅장하게 펼쳐진 군무와 어울려 보기드문 스펙터클을 만들어 냈다.
이를 배경으로 러시아적인 대륙적 선이 굵은 네오클래식풍의 춤이 무대를 장식했다. 특히 러시아적인 선 굵은 정서는 중세의 묵직한 분위기의 시대배경과 아주 잘 어울려 셰익스피어의 경쾌한 즐거움과 비장미가 잘 드러났다. 웅장한 집단 결투장면, 가면무도회 등의 군무신은 장대한 다이나미즘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또 솔리스트들의 결투와 사랑, 질투 등은 군무와 잘 어우러져 묘한 형태미를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가슴 뛰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과 첫날 밤, 그리고 함께 죽는 대미의 부분에서 리듬보다는 형태미를 강조한 회화성 짙은 춤이 빛났다. 결혼을 거부하는 줄리엣에 대해 폭력을 가하는 줄리엣 아버지의 모습 등에서는 진한 러시아 사실주의 예술의 전통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이밖에 머큐쇼의 죽음의 춤을 일본의 전통극 「분라쿠」 형식으로 한 점이나, 무대를 객석까지 연결시킨 것은 클래식발레에서는 드문 파격적인 시도로 관객들의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들이는데 큰 효과를 나타냈다. 또 이야기를 풀어가는 광대처럼, 또는 비극적 상황을 암시하는 카메오로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 한 구석에 숨어서 불현듯 나타나는 죽음의 사자 ‘해골’은 발레의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적 과도한 정열이 다소 신파조로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았으며, 2막의 탬버린과 박수소리 녹음이 다소 어색했고, 베로나 축제 장면에서 무대에 드리운 리본이 너무 길어 춤추는 것을 어렵게 한 것은 옥의 티로 생각된다.


□ 민족춤제전
프랑스 파리 북·동쪽 16개 위성도시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방리외 블뢰」라는 재즈페스티벌이 있다. 올해로 19회가 되는 페스티벌이다. 지금은 파리 주변에서 가장 성공한 페스티벌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 페스티벌이 이 만큼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지금은 파리 음악의 중심인 라 빌레트의 음악감독으로 갔지만 처음부터 지난해까지 이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이었던 작크 포르농은 “10회 째쯤부터는 다음 페스티벌이 열릴 수 있을 지 의심스러웠다”고 고백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페스티벌의 행정담당관인 앤-마리 티노는 “하나의 축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 두 개의 기적 갖고는 안 된다”면서 “수많은 기적이 쌓여야 겨우 하나의 축제가 자리잡을 수 있다”고 했다. 하나의 축제가 지역사회에 자리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말들이다.
민족춤위원회(위원장 김채현)의 「2002 민족춤제전 서울공연」을 보면서 이들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이 축제의 위기상황이 이번 공연에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앤-마리 티노는 “통상 하나의 축제가 생겨났을 때 5년 정도까지는 크게 발전한다”며 “그러나 이후 10년까지 정체, 내지는 퇴보현상을 보이며 10년쯤 후부터 이 축제가 계속 살아날 지, 또는 숨질 지가 결정된다”고 말했었다. 올해로 9회째를 맞는 「민족춤제전」은 앤-마리 티노의 일반적인 축제분석에 꼭 부합되는 위기국면을 맞고 있는 것 같다.
「민족춤제전」의 초기 발전은 주목할 만했다. 하나의 주제아래 발레, 현대춤, 한국춤 등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젊은 무용가들이 대거 참여, 한국 춤 발전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듯 싶었다. 강력한 주제의식 아래 민족춤의 정체성과 진보적 현대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한·일 월드컵」을 기념, ‘축구공은 둥글다, 춤과 함께 하는 지구촌 순례’라는 주제 아래 19일 서울 능동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끝난 「2002 민족춤제전」은 축제의 본래 철학과 아이디어는 形骸(형해)화 한 채 여러 가지 시든 꽃들을 모아 놓은 포푸리(pot-pourris)와 같았다. 과연 10회째가 열릴 수 있을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초라했다.
올해 「민족춤제전」은 ‘환타지아’, ‘갈등과 성찰’, ‘관용과 페어플레이’, ‘평화의 길’ 등 모두 4부로 이뤄졌다. 1부 환타지아를 시작할 때 도저히 ‘환타지아’를 느낄 수 없었다. 음악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였다. 그러나 어떤 머리 짧은 중년의 아저씨가 무대 위에서 축구공 묘기를 보이며 나왔을 때 일부러 키치(kitsch)미를 보이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됐다. 이 축구공 묘기를 부각시키려 막 뒤에서 그림자로도 쏘아 보고,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도 쏴보고 애를 쓴 흔적이 역연하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마치 물질문명에 의해 역사의 뒤로 밀려가는 유랑극단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그런 느낌이었다. 거기에 배경음악으로 나온 「환희의 송가」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악과 이벤트의 조합이었다.
이어지는 영상이미지도 그랬다. TV개그프로에 나오는 ‘나 잡아 봐라’하는 식의 영상이었다. 이것은 전편과는 달리 의도적인 키치미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탱고도 정열은 사라진채 기술만 남았다. 덩그러이 큰 무대에서 영혼도 없이 스텝만 밟는 탱고춤은 기괴하기 조차했다. 몽골 『말춤』, 태국 『황실춤』, 터키 『수피춤』 등의 민속춤에 이르기까지 ‘환타지아’라는 주제아래 무대에 오른 춤과 이벤트는 ‘키치미’에서 ‘미’자를 떼고, ‘키치’하다고 하면 딱 적합한 표현일 것 같다.
2부는 ‘갈등과 성찰’이었다. 『세 남성의 문명목격담』이라는 제목으로 이 순, 이시데 타쿠야 등이 춘 춤은 힘이 있었다. 포즈댄스시어터의 춤도 아크로바틱하면서 건강한 대중적인 춤맛이 있었다. 또 웨스턴 정장의 태평소 소리에 맞춰 춘 박영순씨의 『살풀이』도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갈등’은 보여줬지만 ‘성찰’에는 이르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번 「민족춤제전」에서 가장 의미있는 부분이 있었다고 하면 이 부분이었다.
3부 ‘관용과 페어플레이’에서 결국 몇몇 관객들이 더 이상 ‘관용’하지 못하고 일어서서 나가기 시작했다. 아마 인터미션이 있었다면 더 많은 관객들이 나갔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부 ‘평화의 길’은 프로무대의 춤이라고는 볼 수 없는 초·중·고교의 학예회 수준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월계관을 쓰고 춤을 추는 동작이 너무 진부해 도저히 상상력이나 창조력은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
마지막 「환희의 송가」와 함께 나온 영상은 「민족춤 제전」을 더욱 초라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수미가 상응하는 것은 안정된 느낌을 주는 가장 편안한 구성이지만 출연 작품에 비해 너무 거대한 이미지의 음악이 앞뒤를 에워쌈으로써 가뜩이나 초라한 작품들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특히 다양한 형식의 수준 있는 춤을 담은 엔딩신의 영상은 출연작들을 더욱 안쓰럽게 만들었다. 마치 사실은 이런 춤제전을 만들고 싶었지만, 재정적, 기술적, 창조적, 미학적 능력의 부족으로 이 만큼 밖에 만들지 못했다는 부연설명 같았다. 도대체 「민족춤제전」이 왜 이렇게 됐나하는 안타까움에 화가 나기도 한다. 다음 10번째 페스티벌에서는 기적적으로 일어서는 건강한 「민족춤제전」을 보고싶다.